길을 묻는 세대와 더불어 길을 묻다.

  
 
 
기시감(旣視感, Déjà Vu) 혹은 미시감(未視感, Jamais Vu)?

교회의 위기담론, 특히 청년들의 이탈 현상에 대한 문제는 이미 낡디 낡은 문제이다.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위기 담론들을 주의깊게 읽는 사람들은 이 글을 이미 어디에선가 읽은 것같은 기시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기시감만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지적되지만, 그 문제를 통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기시감은 재생산되고 위기는 일상이 된다. 이런 현상은 비단 글을 읽는 독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문제이다. 그런 기시감 속에서 어떤 글을, 어떤 형식 속에 담을 것인가하는 문제의식이 발생한다.

문제를 문제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체계의 알리바이로 되먹혀지게 될 때, 문제를 ‘문제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 글에는 청년들의 위기 상황을 지적하며, 교회 청년들의 위기담론을 재생산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청년들의 문제를 길게 지켜보며, 긴 호흡을 더불어 하려는 사람들을 찾는 깜깜한 밤의 반딧불이와 같은 시도이다.

청년들의 이탈현상을 청년 세대의 문제로 보고, 해결하려 들면 결코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이다. 문제를 풀려는 사람들은 이미 밭게 돌아가는 체계의 톱니바퀴이거나, 톱니바퀴에 쉽게 먹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청년 세대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청년들의 문제중에 하나가 청년들의 이탈을 문제시하는 사람들이다. 청년들의 문제를 문제시하시는 사람들이 문제로 다룰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은 언어와 행동의 유리현상이다. 말은 관심이 있다, 중요한 문제이다, 시급하게 해결해야한다고 하면서 행동은 그것과는 달리 단기적으로 보이는 외형적 문제들에 치중하는 현상을 보인다. 몇 명이 나왔는가, 지난 번에 비해 얼마나 늘어나거나 줄었들었는가 하는 눈앞에 수치들만을 긴급하게 사고하기 때문이다. 긴급하게 처리할 문제들 속에서,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뒤로 연기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야만 후회 속에서 부상하게 마련이다. 언어와 행동의 유리 현상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사람들은 더 이상 누구의 말도 신뢰하지 않으며, 자신이 운신할 통로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데 급급하거나, 아니면 외형적으로 보이는 커다란 풍경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기대어 더 나은 자리로 올라탈 발판을 만드는데 급급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뚫고 지나갈 방법은 사실은 없다고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현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그 익숙한 상황을 늘 처음보는 것처럼 낯설게 느끼는 미시감속에서 불빛을 깜빡인다. 그 존재의 불빛에 호응하는 깜깜한 어둠 속의 또 다른 반딧불이를 기다리며.

 
이루어진 휴거?

교회에 청년들이 모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맨들맨들해졌다. 이렇게 맨들맨들해진 이유는 젊은 세대들의 문제가 단지 어떤 특정 세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기독교가 구조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징후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잠수함 속의 카나리아처럼, 혹은 배속에 사는 동물들처럼 어떤 위기와 압박감 속에서 탈주를 감행한다.

“1995년에서 2005년 사이에 한국에서 휴거가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90년대 이후 급격하게 감소하는 기독교인들의 통계치를 보면서, 기독교인의 감소 숫자를 아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2005년도 통계청 자료에는 1995년에서 2005년까지 전체 기독교 인구는 143,898명이 감소했다는 발표자료가 나온다. 통계청의 자료가 불확실하니 그것을 감안하면 아마 그 사이에 요한계시록 7장에 나오는 14만4천명의 휴거가 한국에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니냐하면서 우스개삼아 했던 말이다. 하지만 이 통계자료를 들여다보면, 현재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 일단이 예리하게 드러난다. 1995년에 10세에서 24세까지의 연령은 2005년에는 20세에서 34세가 되는데, 통계자료를 보면 이 연령대의 기독교인의 감소수는 60만에 이룬다. 이 통계는 다른 연령대의 기독교인들은 증가의 추세를 보이지만, 청년층은 평균 감소율의 4배가 넘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적어도 1995년부터 2005년까지는 청소년 시절에 개신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은 이 시기에 어떠한 사건과 경험들을 이유로 해서 교회를 이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로는 이들이 다시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탈 현상은 점점 더 가속화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안티-기독교인은 없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한두 가지 이론으로 일매지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청년 세대들의 내외부의 상황과 이야기를 톺아보면서, 그 대략적인 분위기를 감지해보고자 한다. 우선 청년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이버 공간에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 불리지 않고, 개(狗)독교인으로 멸시적으로 호명되고 있다. 물론 이런 호칭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티 기독교인(Anti-Christian)이다. 하지만, 안티 기독교인들의 이야기가 사이버 공간에서 호소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지적하는 문제들이 실제로 발생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청년사역을 하면서 이런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 핵심적으로 활동하는 몇몇 사람들을 만나본 경험이 있다. 이들을 만나기 전에도 미루어 짐작을 했었지만, 실제로 확인하게 된 것은 안티 기독교인들중에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모르거나, 교회를 모르기 때문에 안티 기독교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이들은 현재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다녔거나, 더 성실하게 교리와 성경을 배우려고 애를 썼던 사람들로 보였다. 그들은 성경책과 교리책만을 반복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왠만한 신학교에서 소개하는 개론적인 신학책들과 더러는 전문적인 신학서적들을 섭렵한 흔적을 내비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안티 기독교인으로 변화되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변화된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기독교의 모습을 독선적이고, 배타적이며, 비상식적이며, 소통이 불가능하며, 헌금을 강요하는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었다. 성경에서 제시하는 아름다운 말씀들을 실천하는 기독교인들은 찾아볼 수 없었고, 소위 신앙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몇 가지 구절에 얽매여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협박했던 기억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을 목격한 사람이 더 강한 증오를 표현하듯이, 기독교에 대한 성실한(?) 기대가 이들을 안티 기독교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의문을 가지는 교리적 문제에 대해서 명확하고, 합리적으로 답을 하는 신앙좋은(?) 기독교인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말을 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 올라와있는 내용들 중에는 편협하고 왜곡된 시각에서 기독교의 문제점들을 과장하여 쓰여진 글들과 사건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과장과 흥분을 걷어내고, 차분하게 살펴본 결과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는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속에서 드러내 보이는 수치스럽고, 가슴 아프고, 뼈저린 현실의 모습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기독교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나쁜 그리스도인?!

안티 기독교의 이야기는 단지 한국의 현실만이 아니다. 미국에서 기독교 전문 리서치 그룹인 바나 그룹의 대표가 조사한 현대 기독교 이미지 평가보고서가 <나쁜 그리스도인>(데이비드 키네먼·게이브 라이언, 살림출판사, 2008)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 1996년도에는 “적극적으로 기독교에 참여하는 인구가 적어졌는데도 기독교는 매우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라고 보고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6년에는 기독교의 이미지는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안티 기독교인의 문제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에서도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 책에서 비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직접 경험한 사건들과 기독교인들과의 대화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그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 전달된 부정적인 기독교의 사건을 통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한 것이 아니다. 대중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부정적인 기독교의 이미지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경험 이후에 이를 보충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기독교를 부정적인 것으로 경험하게 만든 6가지 원인과 안티 기독교인들, 그리고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던 청년들의 경험을 엮어서 살펴보겠다.

첫째, 기독교인들은 위선적이다. 기독교인들은 솔직하지도 못하고, 고질적인 문제를 찾아내어 해결하려 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에게는 부족한 면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며, 다만 좋은 이미지를 위해 동분서주한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가 사회적으로 좋은(?) 일처럼 비쳐지는 행위를 할 때, 너무나 자신의 모습을 과도하게 들어내려는 모습을 보면서 위선적으로 느껴진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oo교회’라는 어깨띠를 두르고 마을에서 청소를 할 때나,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류장같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서 차를 나누어 줄 때, 가식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왜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말씀대로 행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둘째, 기독교인들은 전도에만 지나치게 집착한다. 요즘 대학교에서는 신입생들에게 오리엔테이션을 하면서 사이비 종교단체, 혹은 기독선교단체가 접근해올 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 호락호락한 인상으로 보여서 말을 하는 것을 받아주게 되면 적어도 1시간이상 붙잡혀 있어야 하고, 혹시라도 핸드폰 번호라도 알려주게 되면 한 학기 내내 시달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렇게 매우 공격적이고 불쾌한 전도/포교행위를 접하게 되면 경비실로 전화하거나, 단호하게 거절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셋째, 기독교인은 동성애를 혐오한다. 어느 대학교에서 축제기간동안 동성애 동아리에서 내걸었던 현수막이 밤새 모두 훼손되었고, 그 주범자가 기독교 선교단체 학생인 것으로 밝혀졌던 일이 있다. 이런 일과 유사한 사건들은 축제기간에 세워놓은 장승이나, 초등학교에 세워진 단군상등이 잘려나간 일이나, ‘사찰 땅밟기’와 같은 사례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문제들이 사회적으로 표면화되면 간혹 자신들의 행위에 대하여 사과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성이 담겨있는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후에 그들의 말과 행위를 보면 사과라는 것은 그저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했다는 것을 여실하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넷째, 기독교인들은 ‘온실 속의 화초’라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 속에 머물고 싶어 하며, 사람을 비지성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들이 다른 사람들은 잘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와 어법에도 맞지 않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며, 편협하고, 소심하고 무지하다고 말한다. 한 마디로 ‘꽉 막힌’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다섯째, 기독교인은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20년 전에 기독교는 사회 정의와 인권을 열정적으로 외치는 운동처럼 보였는데, 그러나 현재의 기독교는 본래의 메시지는 온데간데없고,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외치는 공격적인 정치 전략에 자리를 빼앗겨 버린 것 같다고 한다. 특히, 기독교를 대표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이 하는 모습들이 타락한 정치가들이 하는 행위와 다르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더 우월해야할 곳이 돈과 권력으로 이전투구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독교에서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지가 의심스럽다고 말을 한다. 단적으로, 기독교가 아직은 성장을 구가하던 80년대와 안티 기독교인들이 나오면서 기독교가 후퇴하는 21세기에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가 어디이고 이들이 무엇을 했고, 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다.

여섯째,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우월한 입장에서 타인을 판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며, 원수까지 사랑하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실제 행동을 보면 타인을 정죄하며, 자신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전부 다 죄인이며, 자신들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는 것이다. 특히, 지하철에서 다른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는 큰 소리로 전도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나 잘해!’라고 외치며 같이 싸우고 싶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이 책과 안티 기독교인들, 그리고 개신교에 대해서 실망을 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자리에서 서서 들어보려 애를 쓰게 되면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것을 단적으로 그려본다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협박과 세뇌라는 기법으로 종교 상품을 팔아먹는 악덕 기업가’라는 것이다. 자본으로 구성된 시장이라는 말이 문제가 많은 개념이긴 하지만, 고객의 선택이라는 나름대로의 합리성이 존재하는데 기독교는 이러한 형태의 합리성도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2010년 서강대 대학원 조세희는 자신이 쓴 사회학과 졸업 논문 “합리적 선택론에서 본 한국 개신교와 가톨릭의 교세변화:1995-2005”에서 개신교의 감소와 비교하여 가톨릭의 증가원인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한국과 같은 다원 종교적 상황에서는 타인들에 대한 관용성과 대화적 태도가 가톨릭 교세 성장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가톨릭 통계자료에서도 개신교보다는 상대적으로 적지만 청년들의 감소가 보고되어지는 것을 보면 청년들의 이탈 현상은 종교가 지니고 있는 이미지나 태도 이외에도 다른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대학생

청년 세대가 교회를 등지는 것은 단지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나 태도 때문만은 아니다. 청년 세대들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보다 자신들의 경제적인 삶을 옥죄는 현실에 쫓기어 교회에서 이탈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들이 처해진 사회적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가혹한 현실로 변하고 있다. 1980년에는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23.7%에 불과했지만, 1995년에는 이미 50%가 넘었고, 2009년에는 81.9%가 되었다. 거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고, 최종학력이 고졸인 사람이 오히려 드문 세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대학교육을 받는다고 할 때, 청년들의 현실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대학의 문제를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몇 년 전에 한국 청년들의 현실을 소개한 <88만원 세대>(우석훈, 레디앙, 2007)는 20대들이 공정하지 않은 조건에서 다른 세대들과 경쟁하며, 아무도 살아날 수 없는 개미지옥에 빠져있다고 이야기했다.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개미의 머리 위에 서야하지만, 결국은 개미지옥에서 조금 더 오래 살아남을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 책이 20대의 취업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면, <미친 등록금의 나라>(한국대학연구소, 개마고원, 2011)는 대학 등록금이라는 대학의 경제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대학생들이 교육을 받으면서 지불해야할 등록금의 현실을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평균 5%씩 등록금이 인상된다고 가정해보자. 2010년 대학에 입학한 A군(남학생, 2년 재학 후 2년 군생활, 이후 복학한다고 가정)이 국립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2,017만 원이, 사립대학을 졸업하기 위해서는 평균 3,425만 원이 필요하게 된다. 2010년 초등학생 3학년(10세)인 B군이 10년 후 국립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등록금은 3,285만 원, 사립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등록금은 5,578만원에 이르게 된다. (…) 매달 50만원씩 적금을 붓는다고 해도 은행 평균금리(3.3%)를 감안했을 때 1년 후 세후 수령액은 61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 그렇게 10년을 모아야 겨우 내 아이의 4년간 대학등록금을 모을 수 있단 얘기다.” 이 사례는 대학 등록금만 계산한 결과이다. 여기에 교육을 받기 위해서 필요한 다른 비용들과 생활비 등과 취업준비를 위한 스펙를 쌓는 여러 가지 경비를 생각한다면 훨씬 더 증가할 수 밖에 없다. 등록금을 내기 위해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대학을 8년, 9년을 다니는 학생들과 학자금 융자 때문에 졸업하자마자 신용불량자가 되는 대졸자들과 대학등록금 때문에 자살하는 대학생 이야기들은 청년들이 처해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그려내 주고 있다.

 
끝없는 경쟁

대학 등록금의 문제는 ‘큰 배움’을 이야기하는 대학(大學)의 현실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나타내주는 지표이다. 올초에 나온 <대학과 자본주의 국가>(클라이드 W. 바로우, 문화과학사, 2011)와 <대학 주식회사>(제니퍼 위시번, 후마니타스, 2011)라는 2권의 책은 미국의 대학들이 어떻게 상업화하고 기업화되었는지를 잘 그려내 보여주고 있다. 산학협력이라는 명목하게 장사에 혈안이 된 대학들과, 돈에 눈이 멀어 학자로서의 양심은 던져 버린 지 오래인 교수들과, 박봉과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교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던 시간강사들, 그리고 치솟는 등록금에 허리가 휘청거리고 있는 학부모들, 취업을 위해 스펙(Specification, 회사 취업시에 유리하기 위해 대학생 시절에 갖추어 놓아야할 것으로 학점, 어학연수, 인턴실무, 사회봉사, 자격증, 외모 등을 말한다)쌓기에 혈안이 된 학생의 모습들...... 미국의 대학을 벤치마킹하면서 따라가고 있는 한국의 대학의 모습은 오히려 미국 대학보다 더 물신화되어 있다. 또한 이런 대학 체계에서 대학생들은 큰 배움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면서 더불어사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꿈을 꾸는 지성인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개미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는 취업 준비생으로 전문 기술자가 되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방과후 학교, 학습지, 피아노, 컴퓨터 등등으로 정신없이 보내고, 중학생 때는 종합학원, 고등학생 때는 국영수 단과반, 논술, 봉사 등등으로 1등에서 꼴찌까지 줄 세우는 경쟁을 해왔고,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도 취업을 위해 또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사회에서 그들이 행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는 ‘명품’이 되기 위해서 ‘자기경영’이라는 방식으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기업의 방식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 대학생들은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기보다는 사회가 만들어놓은 질서에 순응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결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도태되고 만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신경증을 앓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

현재 청년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현실을 살펴보기 위해 기독교의 부정적인 이미지로부터 대학의 현실까지를 간략하게 에둘러보았다. 이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교회의 시장화, 지식의 기술화, 학문의 직업화, 대학의 기업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요즘 청년들은 자기들을 가리켜 ‘삼포 세대’라고 자조적으로 말을 한다. 삼포 세대란 3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말인데, 연애를 포기하던지, 결혼을 포기하던지, 그것도 아니면 자녀를 포기한 세대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서 3가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되는 세대에게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를 해야할 것인가? 교육을 이윤추구를 위한 ‘인적 자원’의 생산이라고 말하고 있는 자본의 포로가 된 사회에서 교회는 청년들에게 무엇을 말해야하고,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여러 가지 사회문제로 어렵고, 가치관이 혼란한 시대에 사람들은 자신들을 위로할 수 있고, 별고민없이 따를 수 있는 외적인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오히려 근본주의적인 입장이 힘을 더 발휘한다는 것이다. 근본주의적인 입장에서 확실하게 어떤 가치를 제시하고, 그것이 사실이 아닐찌라도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성장을 제시하면 불안한 사람들이 이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이는 확실한 것을 만들 수 있는 곳에서는, 열광할 수 있는 장치를 구축할 수 있는 곳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부딪혔을 때 외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마 시장에서 인정받는 명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그도 아니면 그런 시늉을 할 수 있는 일부 대형교회들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청년들의 이탈 현상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며, 단기적으로 청년들의 성장도 가능할 것이다. ‘명품’이 인정받는 사회에서, ‘명품교회’가 되고, ‘명품 기독교인’이 되자는 방식으로. 하지만 ‘명품 브랜드’가 되자는 방식으로는 청년들의 이탈 현상을 근본에서 막을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명품’이 된다는 것은 시장이 요구하는 질서에 부응한, 내면화된 자본의 가치를 인각한 몸에 불과할 따름이다.

명품이라는 생존방식은 출애굽 상황에서 모세가 자리를 비워보이지 않게 되자 히브리 백성들이 요구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확실하게 눈에 보이는 것,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것, 우리가 도취할 수 있는 것. 그래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열광적으로 경배했던 히브리 백성들의 모습은 아닐까? 눈에 보이는 것들과 열광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제공하는 것은 문제을 직면해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서보명은 <대학의 종말>(동연출판사, 2011)이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청년들의 교육 상황을 보면서 예루살렘의 성전이 파괴되고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와서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상 한다. 그는 정신의 고향인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고난의 역사를 살면서, 스승과 제자가 둘러앉아 하나님의 말씀을 묻고 배우며 묵상하는 전형적인 탈무드의 공부 모습을 보면서 교회 교육의 ‘오래된 미래’를 본 듯 하다. 탈무드 교육의 요체는 교리를 진리로 알고 반복해 외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통해 끝없는 토론과 논쟁의 해석학을 이어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시기에 통하는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매 시기마다 새롭게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식의 교육 과정은 대량 상품 생산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교육방식이다. 교리를 암송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삶의 현실에 직면해서 무엇이 문제인가를 묻고, 그 대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학생들과 대화하는 질문과 대답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가 처해져 있는 상황과 한계를 묻고, 그 한계를 조건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훈련의 과정은 외부에서 주어진 질서를 따르는 도덕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덕이라는 미명하에 구획되어진 잘못된 질서를 바로잡는 기준을 가진 메타도덕적인 인간을 형성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예수를 따르는 청년들을 위한 미래 교회의 가능성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년들을 관리 대상, 교육 대상, 통제 대상이 아니라 신앙을 통해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성찰적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시대를 직시하면서 정의를 외치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도록 함께 진지하게 질문을 하도록 자극하는 것. 이러한 성찰과 참여의 과정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진지하게 묻는 기도와 더불어 함께 가야한다. 여기서 기도는 더 이상 무엇을 바라고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영혼을 승화시키며, 오늘 이 시대에 기독청년의 존재의미를 다시 찾는 질문이며, 그 대답을 찾아 지며리 나아가는 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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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9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8-10 7211
37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8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28 7178
36 기독교세계 방글라데시를 다녀와서 -1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27 8356
35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7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21 7287
34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6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06 7478
33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5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01 6690
32 기독교세계 봉쇄 수녀들, 수도원 박차고 나선 이유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30 9504
31 기독교세계 1992년'김영삼장로위한조찬기도회'를규탄하는기도회(1992년12월07년,KSCF외)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26 9756
30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4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24 8136
29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3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16 7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