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구원을 구원할 수 있는가
[260호 시각 문화와 정치]
[260호] 2012년 05월 29일 (화) 21:07:45 김오성 skenosis@daum.net

점점 더 넓어지는 자이어1) 속에서 매는 돌고 돌면서
주인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사물들은 서로 떨어지고 중심은 잡지 못한다.
그저 무정부만이 세상에 퍼지고


인간의 조건을 묻는 학문인 인문학(人文學)의 ‘문’은 글월 문(文)을 쓴다. 글월 문(文)은 몸에 칼로 상처를 낸 사람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에서 그 기원을 찾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상처의 무늬가 빠지고 사람 모양만이 남아 오늘날과 같은 한자가 되었다고 한다. 글월 문 자의 기원은 고대 세계의 풍습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고대인은 사람의 죽음을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통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고 죽은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기 위해 가슴 부위에 일부러 ‘X’ 모양의 칼집을 내어 피를 흘리게 하는 풍습에서 글월 문이 생겼다는 것이다. 몸에 칼집을 내는 행위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하는 사회적,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종교적, 어떤 사람이 죽었다고 선언하는 정치적, 삶과 죽음이 어떻게 겹치고 헤어지는지를 무늬를 통해 보여 주는 예술적 행위였다. 글월 문(文)은 무늬를 나타내는 문(紋)과 어원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을 통해 인간의 조건을 묻는 인문학(人文學)은 사람의 무늬를 헤아리는 인문학(人紋學)이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문학(文學)으로 글의 울림과 공명에 주목하며, 문학(紋學)으로 사람의 무늬,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복잡하게 중첩된 관계를 읽어 내는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다.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사회적이며,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며, 예술적인 행위라고 이해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상호 관련성 속에서 서로를 굴절시키면서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무늬는 하나의 결이나 하나의 색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두 개 이상의 결이나 색이 어떤 질서(理, 리)에 따라 서로 어울리며 만들어지기 때문에 사물의 이치를 깨닫는 문리(文理)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 점에서 문리가 트이는 행위는 단지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닌, 다른 것과의 관련성 속에 그 차이를 분별해 내고, 그것이 시간성 속에서 어떻게 변하는지를 깨단하는(오랫동안 생각해 내지 못하던 일 따위를 어떠한 실마리로 말미암아 깨닫거나 분명히 아는) 것이다.

피에 물든 파도가 너울댄다. 그리고 사방에
순수의 의식은 물에 빠져 사라진다.
최상의 것들은 확신이 부족하지만,
최악의 것들은 온통 열정적인 강렬함으로 가득하다.


1999년 유난히 무더웠던 여름, 나는 선풍기 하나로 더위를 이기면서 ‘밀레니엄 버그와 세계의 종말’이라는 주제로 글을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하고 있었다. 종말이라는 주제는 손쉽게 휴거를 주장하던 다미선교회와 시한부 종말론으로 연결되었다. 자료들을 섭렵하면서 세기말과 종말이라는 주제가 어제오늘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짧게는 수백 년에서 길게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하는 그룹들은 중세에 들어서기 이전부터 존재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마야의 달력, 파티마의 예언, 주역 등도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전거였다.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던 이들은 그 날짜가 지나면, 계산 착오였다며 시한의 연장을 주장하거나 종말을 주장하면서 챙긴 재산을 가지고 조용히 잠적하는 것이 전형적이었다.

물론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시한부 종말론을 주장한 사람들과는 달리 인류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도 있었다. 성장의 한계를 주장하는 로마클럽 보고서나 핵무기에 의한 종말을 경고하는 인류종말시계, 온난화 등을 이유로 한 생태계의 파괴, 소행성 충돌,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신종 바이러스와 입자가속기 등)에 의한 멸망 등 말이다. 그 자료를 토대로 대충 원고를 정리하고는 마지막으로 다미선교회가 휴거를 주장하던 날과 같은 날에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글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992년 10월 28일의 사건’으로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충격적인 이미지를 보았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발행한 자료집에 실린 윤금이 양 살해 현장의 사진이 그것이었다. 종말이 어떻게 제도를 통하여 개인에게 관철되는지를 징후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분명히 어떤 계시가 가까이 와 있다.
분명히 재림이 가까이 와 있다.
재림! 그 말들이 나오자마자 어떤 거대한 이미지가
세계령2)으로부터 나와 내 시야를 괴롭힌다.


▲ 영화 <지옥의 묵시록>의 포스터
전쟁의 광기로 휩싸인 윤금이 살해 현장의 이미지는 ‘불안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잠식하는가’를 잘 보여 준 프란시스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을 떠오르게 했다. 영화는 전쟁에 회의를 느끼던 윌라드 대위가 반란자로 지목된 커츠 대령을 제거하는 과정을 그리며, 전쟁이라는 지옥과 같은 상황에 대한 저항이 어떻게 또 다른 지옥을 만들어 가는가를 보여 준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다 보면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이 요구한 법칙을 따르든지, 그 법칙에 저항하든지 둘 다 괴물이 되었거나 되어 버릴 위험성에 처하는 것이다.

국제법상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포 없이 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상태인 휴전의 장기화는 전쟁의 불안을 일상의 코드로 내장시킨다. 이 불안을 견뎌 내기 위해 사회는 주기적으로 포르트-다 게임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게임은 어머니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실로 길게 늘어뜨린 실패를 침대 밑으로 던졌다가 꺼내는 아이의 놀이를 말한다. 프로이트는 아이들이 이 놀이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며 불안의 감정을 견디어 낸다고 해석한다. 일부 그룹은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매개로 주기적으로 포르트-다 게임을 한다. 이 게임이 전 사회적 행위가 될 때,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이 행위에 접속되어 어떤 욕망을 분유받게 된다. 이렇게 분유된 욕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것을 자신의 욕망으로 삼든, 억압하여 회귀로 돌아오든 그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점은 쉽사리 찾아볼 수가 없다. <지옥의 묵시록>으로 번역된 영화의 원제가 바로 ‘지금 여기가 종말’이라고 말하고 있다면, 사회적 포르트-다 게임을 통해 분유된 욕망은 한국 사회를 묵시록의 현장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막 모래 어디에서인가 사자의 몸을 하고
인간의 머리를 한 어떤 형체가
텅 비고 태양같은 무자비한 시선으로
그 느린 허벅지를 움직인다.


종말의 불안을 감내하는 방식은 전쟁을 상징하는 실패를 침대 밑으로 던졌다가 꺼내는 포르트-다 게임 외에, 전쟁 자체를 환상처럼 즐기는 방식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지젝은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을 ‘현실의 스펙터클을 구경하기 위한 거대한 극장’으로 묘사했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군사분계선이라는 거대한 스크린을 앞두고 시각적 쾌락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군사분계선의 ‘극장화’, 이것은 한반도의 곳곳에서 진행되다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몸으로 옮겨 갔다.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몸은 사회적 욕망이 각축하는 경연장이 된다. 요즘 들어 폭발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은 상품 시장이 사회를 전일적으로 지배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징후다. 서바이벌 오디션의 현장은 상품 시장으로 치환된 살아남기(survival) 위한 전쟁터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닌 재능과 더불어서 외모, 경제력, 학력, 경력 등은 말할 것도 없이 남들에게 감추고 싶었던 고통과 상처까지 시장 상품으로 전화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서 고통과 상처를 전시하는 것은 그러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그것을 이겨냈다는 의미와 감동을 선사하기 위해서다. ‘트라우마(고통과 상처)의 상품화’는 자본의 욕망에 붙잡힌 도착적 주체의 모습을 여실하게 그려 낸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자본의 욕망에 사로잡힌 도착적 주체의 모습들은 영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의 좀비로 등장한다. 좀비의 특이성은 그 충실성에 기초한다. <복음과상황> 4월 호에 실린 ‘좀비와 신자유주의 사회의 악몽’에서 정정훈은 좀비의 특이성으로 신자유주의 욕망에 대한 ‘충실성’을 들고 있다.

주변에 온통 성난 사막 새의 그림자들이 빙빙 돌고 있다.

▲ 영화 <데이브레이커스>의 포스터
우리는 신자유주의 세계 내에 거주하는 존재다. 즉각적으로 이 세계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세계 내적인 존재라고 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상품으로 치환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가치만을 자신의 가치로 내재화하고 살아갈 필요는 없다. 이 세계 내에 터하고 있지만, 동시에 이를 거슬러 살아가는 다른 삶의 양식(on & against)이 필요하다. 그러기에 다른 삶의 양식을 질문하면서 ‘다른 형태의 좀비’로 이루어졌던 공동체를 상상해 본다. 성인 베네딕트는 수도원을 체계적으로 정초한 사람으로 알려진다. 그가 세운 수도원 규칙은 ‘기도하고, 노동하고, 학습하라’였다. 기도하고, 노동하고, 학습하는 단순한 행위에 ‘충실한 수도사’들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좀비의 모습과 닮아 있지 않은가?

수도사를 역설적인 좀비라고 본다면 영화 <데이브레이커스>는 예수의 성만찬을 비튼 영화로 읽을 수도 있다. 사람들을 흡혈귀로 만드는 바이러스에 대한 해독제가 전에는 흡혈귀였으나 사람으로 되돌아온, 바로 그 사람의 피라는 발상에서 그렇다. 자신의 몸을 사랑의 징표로 내어 주면서 그 살과 피를 받아먹으라는 성만찬은 사람들이 음식을 섭취하는 과정의 역전을 보여 준다. 성만찬의 과정에서는 사람이 먹은 빵과 포도주가 소화되고 흡수되어 사람의 몸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빵과 포도주가 사람을 먹어 버리는 것이다. 흡혈 바이러스의 해독제를 성만찬이라는 코드로 읽을 수 있다면, 해독제를 만드는 과정은 타자가 근원적으로 자신의 구성 요소였음을 인정하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흡혈귀였다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과정(사람 -> 흡혈귀 -> 사람)은 어떤 독창적인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독을 약하게 쓰면 약이 된다는 것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이겨낸 혈액의 혈청이 백신이 된다는 약간의 의학적 지식만으로도 가능한 것이다. (물론 영화에서는 이 백신을 찾기 위해 무던히 고생을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변화의 계기를 찾아내고, 그 고통의 과정을 이드거니 행한 결과 햇빛 아래에서 흡혈귀로 죽는다는 것이 요체다. 극심한 고통의 과정을 견디고, 그 결과 햇빛 아래에서 흡혈귀로 죽음으로써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그것은 다시 말하지만 내용이 아니라 변화의 형식과 그 형식에 필수적인 시간성이다.

변화는 긴장과 고통의 과정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서 비용을 치른 결과 얻게 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다. 이런 변화의 계기는 나라는 존재가 이미 타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시작한다. 문제는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은 잘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과정을 선택해서 무수히 반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한 신에 대한 체험은 삶의 양식을 통한 충실성 속에 응결된 산물인 것이다. 신비주의자들이 경험한 체험의 과정은 쉽게 설명할 수도 없고, 설명되지도 않는다. 다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에둘러 살펴볼 수만 있을 따름이다. 아다마르는 ‘수학분야에서의 발명의 심리학’이라는 흥미로운 에세이를 썼다. 그는 여기에서 수학자가 새로운 발명을 할 때는 일련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혔다. 그것은 수학적 공식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천재적인 영감으로 느닷없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공식을 위한 ‘충실한 실패’를 반복한 결과로 지쳐서 잠시 쉬다가 다시 의지를 불태워 노력하는 순간에 불현듯 주어진다는 것이다.

어둠이 다시 내린다.
그런데 지금 나는 바위 같은 잠에 빠진 20세기가
흔들거리는 요람에 의해 악몽에 시달리고 있음을 안다.


신비 체험은 이런 점에서 사람의 의도적인 노력으로 얻어지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거저 주어지지도 않는다. 수도사들이 일상을 통해 하나님에게 자신을 도구로 써 달라고 내어놓는 ‘능동적 수동’(관상적 삶의 상태인 ‘함과 하지 않음의 복합성’을 표현하기 위해 개념화한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불현듯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자신을 끊임없이 내어놓는 것이다. 그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고, 또 없어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얻게 되는 체험 속에서 가장 주목할 지점은 십자가의 요한의 말대로 ‘하나님의 빛을 향해 나아가는 영혼이라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어두운 밤’에 관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어둠은 사탄이 틈타는, 신앙인이 피해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어둠이 하나님과 거룩한 일치 안에서 충만한 사랑과 기쁨의 영광을 맛보게 한다고 말한다. 빛 가운데서는 나와 세계와 하나님이 분리되지만, 어둠 속에서는 그 모든 것의 차이가 무화되어 거룩한 일치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성과 속, 빛과 어둠, 남과 여, 하늘과 땅, 선과 악 등과 같이 전통적으로 이분법적으로 대립되던 쌍들의 우열관계를 전복시키는 행위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과 일치를 맛볼 수 있다면, 이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이룰 수 있고, 땅에서 하늘을 누릴 수 있고, 악 가운데에서 선을 찾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의 사고로는 악 가운데서 선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반대를 생각해 보자. 영화 <바벨>에서 선의로 건네진 라이플이 일으키는 악한 결과를 본다면, 인간이 선과 악으로 인식하는 행위는 큰 맥락에서 시간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복잡한 상호 과정을 파악하지 못한 판단일 수 있다. 작은 선이라고 생각하는 행위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거대한 악의 문제로, 아우슈비츠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형 집행인을 상상해 보라.)

▲ 영화 <스티그마타>의 포스터
이분법적인 대립 쌍의 전복을 통해 다시 읽어 보고 싶은 영화는 한국에서 공포 영화로 소개되었던 <스티그마타>다. 사람들이 압도적인 존재를 경험할 때, 그 경험은 공포일 수 있다는 점에서 초기의 종교 체험은 늘 공포와 맞물려 있다. 그런 점에서 <스티그마타>는 종교를 매개로 사용한 공포 영화로도, 종교 체험의 심리를 공포 영화의 스타일로 연출한 종교 영화로도 읽을 수 있다. 문제는 체험된 공포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공포 영화에서 공포스런 존재는 늘 외부에서 등장하는 어떤 낯선 것들이었다. 그러나 가장 두렵고 무서운 것은 외부에 나타난 어떤 낯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을 섬뜩하게 하는 것은 친숙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 속에서 느껴지는 어떤 낯섦이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기이한 낯섦을 언캐니(uncanny)라는 말로 분석한다. 원래는 친숙한 것이었는데 억압되었다가 나타나기 때문에 낯설고 두려운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 개념을 가지고 <스티그마타>를 확대해서 읽으면,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 느낀 그 공포는 그가 일상 속에서 친숙하게 느꼈던 어떤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자신 속에 내재한 타자로서의 신을 언캐니한 것으로 느끼고, 이런 경험이 자신의 몸에 성흔(스티그마타)으로 각인되어, 그것이 발현되고 있음을 시각화한 영화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할 때 여주인공이 기이한 언어로 “천국은 나무나 돌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너희들 마음속에 있다. 나무를 쪼개도 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요. 돌을 치워도 내가 그곳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일상에서 경험하는 친숙한 낯선 것들의 체험을 통해 ‘신을 만나면 죽는다’는 말처럼 죽어 새롭게 변하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다.

어떤 거친 짐승이 드디어 그때가 되어
태어나려고 베들레헴으로 기어오고 있는가.


▲ 영화 <희생>의 한 장면
구원의 테마로서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일상을 새롭게 보는 행위와 관련한 주제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나타난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 알렉산더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죽은 나무에 정성껏 물을 주어 꽃을 피웠다’는 어느 수도사의 이야기를 실어증에 걸린 아들에게 들려주며 바닷가에 죽은 나무를 심는다. 알렉산더는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으로 3차 대전을 막지만 정신병자로 끌려간다. 영화는 아들이 아버지 알렉산더를 대신하여 죽은 나무에 물을 주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영화는 롱-테이크로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너무 지루해 ‘보다가 잠들었는데 다시 깨 보니 아직 그 장면’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희생>이라는 영화가 구원을 보여 주는 방식은 서사 구조가 아닌 영화의 형식을 통해서다. 이 영화는 끝없이 이어지는 장면을 통해 일상성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이 일상성을 동정적 혜안을 지니고 낯설게 보는 이에게만 틈 사이의 빛 속에서 종말의 구원이 맥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말에서 구원이라는 주제로 발 빠르게 넘어가려는 이들은 도무지 구원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본문 중간에 인용한 글은 W. B. 예이츠의 ‘재림The Second Comming’이라는 시이다. <예이츠 시선>(허현숙 옮김, 지만지)에 실린 역본을 사용했다. 이 글은 예이츠의 시에 대한 이미지를 참조하면서 구상했다.)

1) 자이어(gyre): 원추 모양의 것. 한 자이어의 꼭지와 다른 자이어의 밑바닥이 서로 붙어 있는 두 개의 자이어 형상으로 예이츠는 인간 역사의 변화 등을 설명한다.
2) 세계령: ‘Spiritus Mundi’ 또는 ‘Anima Mundi’의 번역이다. 예이츠는 이를 인간계 너머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이미지들이 마치 커다란 수초처럼 자라나서 움직이는 커다란 정원과 같은 것으로 설명한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8 기독교세계 WCC란 무엇인가? file KSCF 2012-08-03 3690
47 기독교세계 생명·평화·정의 세상을 향한 한국교회 정책선언서 file KSCF 2012-07-24 2328
» 기독교세계 우리 시대에 구원을 구원할 수 있는가? / 김오성(복음과 상황 6월호) KSCF 총무 2012-06-25 3029
45 기독교세계 2012 Taize 보고서 - 박병철 대학부장 KSCF 대학부 2012-04-12 2619
44 기독교세계 ‘책임적 주체’의 기독교인으로 거듭나야 / 이가연(이대 SCA) KSCF 2012-01-21 3335
43 기독교세계 [기독교사상 '11년9월 특집] 길을 묻는 세대와 더불어 길을 묻다 / 김오성 KSCF 총무 2011-09-15 4428
42 기독교세계 지평선이 그려 내는 꿈 (농활을 다녀와서) / 이광민(성공회대 SCA) KSCF 2011-07-14 4597
41 기독교세계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60주년을 맞이하는 기독학생의 다짐 KSCF 2010-05-07 7191
40 기독교세계 한국교회에 2010년 설날에 드리는 글 pancholopez 2010-01-28 9421
39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10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8-10 7300
38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9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8-10 7162
37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8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28 7128
36 기독교세계 방글라데시를 다녀와서 -1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27 8309
35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7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21 7244
34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6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06 7434
33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5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7-01 6638
32 기독교세계 봉쇄 수녀들, 수도원 박차고 나선 이유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30 9418
31 기독교세계 1992년'김영삼장로위한조찬기도회'를규탄하는기도회(1992년12월07년,KSCF외)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26 9709
30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4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24 8088
29 기독교세계 짐바브웨를 다녀와서 -3 file KSCF자료정리간사 2009-06-16 7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