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학생운동론(제3시대)[1].hwp

현 시대 기독학생운동, 어떻게 할 것인가?"

- 전망과 제언을 중심으로-

김오성

Intro : 언거번거한 이야기

이 글은 2년 전 기독교사회포럼에서 발표한 글이다. 요즘 같은 시절에 2년전 글이면 골동품에 속해야하지만, 기독교 동네에서는 글이 잘 유통되지 않는지라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글을 써놓고 구체적인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 몸도 몸이고, 또 그 와중에 이식수술을 받으면서 몸조리하느라 생각을 진전시키지도, 몸으로 뛰어다니지도 못했다. 제3시대 월례포럼에서 어쩌면 2년동안 골방에 처박혀 곰팡내가 팍팍 쓸고 있는 이 글을 끄집어내어 발표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이 글이 오달지거나, 튼실해서가 아니다. 다만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하는 지형을 그려내기 위한 어떤 조잡하거나 조악한 스케치, 혹은 기독(학생)운동의 말문을 트기 위한 어떤 안주거리(씹을 거리)를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거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기독학생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호의와 신뢰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이들과 더불어 운동을 지며리 풀어나가고 싶기 때문이다.

1. 사라지기 혹은 다시 시작하기

기독학생운동의 위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공공연한 이야기 혹은 진부한 이야기가 되어버린지 오래이다. 이와 더불어 기독학생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일하고자 하는 학생들은 기독학생운동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독학생운동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거나 아니면 사라지기라는 절대적으로 구석에 몰린 상황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현재 기독학생운동은 망한 부자가 버티고 있는 3년째의 마지막 한 해라는 절박함을 가져야 한다.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기독학생운동이 활발하게 움직일 때 가지고 있던 정신과 상상력을 오늘 우리 시대에 걸맞게 다시 불러 일으켜야 하는 것을 말한다. 초기에 기독학생운동은 학원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해야 하는가를 고민했었다. 그리고 점차로 기독학생운동은 ‘한국을 새롭게’라는 새로운 비전과 상상력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이러한 고민과 상상력을 통하여 기독학생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헌신하면서 한국 사회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사회가 되도록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고, 그 상상의 일부를 성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현재 기독학생운동은 한국 사회에 대한 어떠한 상상과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켜서 사회를 새롭게 하고자하는지,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 새롭게 하려고 하는지를 스스로 물어보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기독학생운동의 현재적 과제를 참기 위해서 우리가 출발해야 할 지점은 현실 문제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새롭게 지도를 그려보는 일일 것이다. '새로운 지도 그리기'는 과거에 어떤 활동을 같이 해왔는가 보다는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고, 무엇을 변화시켜야하는가를 서로 이야기하는 작업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푸른 바다로 변한 뽕나무 밭과 현재적 상황에 뽕나무 밭 시절에 그려졌던 지도를 가지고 여전히 뽕나무 밭을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조각난 지도만을 가지고 큰 대륙을 탐사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를 살펴보면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은 나와 같은 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변화된 지형을 바라보면서 자기를 변화시키려는 태도를 지닌 사람들과의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의 지도만이 '올바른 지도'이니 이 지도를 보고 우리가 가려는 방향으로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도들을 서로 공유하면서 이 험악한 지형을 뚫고 나가려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대화와 소통의 과정은 전혀 이질적인 것을 전제로 그 사이에서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생물계에는 '동종 유전자에 의한 생식'을 유전적으로 거부하는 생리적·문화적 장치가 되어있다. 동종 유전자에 의한 생식은 실험실과 같은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유용한 생식 전략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급격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는 멸종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이질적인 유전자를 서로 받아들여 가지고 있는 정보를 공유하고 나누는 과정이 서로를 살려내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쉬운 일은 아니며, 오히려 갈등과 혼돈, 방황과 부적응, 아릿함과 뻐근함,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거쳐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시작하기 혹은 사라지기'는 기독학생운동이 길을 잃어버렸다는 조난의 신호이며,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각난 지도를 같이 나누어보고자 하는 구조불빛의 표현이기도 하다. 기독학생운동이 우리에게 선사한 상상력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일, 그래서 우리 앞에 놓여진 심연과 어둠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 그리고 그 한 가운데에서 서로에게 성찰의 근거가 되는 일!

2. 바벨과 오순절

현대 한국사회 운동에서 일어난 일들을 바벨의 사건과 견주어 생각하는 것은 기독학생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 진영에는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바벨탑의 붕괴는 인간에게 징벌이었을까, 아니면 은혜였을까? 바벨 사건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방언을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한 인간들에 대한 징벌의 사건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바벨탑 사건에 대하여 전통적 해석과는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벨탑을 건설하는 제국의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한 가지 언어로 통일된 인간의 언어였고, 이 동일성의 언어가 독재와 전제를 작동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차이와 다름 혹은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동일성의 언어는 힘을 집결시키는 깃발이였다. 하지만 "괴물을 상대하다가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고백은 동일성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거울 효과를 그려내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벨탑 붕괴 이후 방언은 오히려 인간의 차이들을 들어내고, 다름을 알아차릴 수 있는 성찰의 근원적 사건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형식적 민주화는 이후 한국 사회에 숨겨져있던 온갖 형태의 차이와 다름을 들어내고 표현할 수 있는 차이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와 다름은 이분법적인 도구로 바라보던 세계에 다채로운 색깔의 가능성과 적어도 흑과 백만이 아니라 흑과 백 사이에 회색 진영이 존재함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흑과 백 사이의 그라데이션! 작은 이야기들의 복권과 그 해방적/비판적 효과.

기독학생운동은 지난 십여년간 흑과 백 사이에 존재하는 농담(濃淡)을 탐색해왔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색깔을 얻기도 하였으며, 더욱 깊숙한 영역으로의 진입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전 시기에 우리를 움직여오던 관성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다름'을 곧잘 '틀림'으로 받아들이곤 하였다. 또한 새롭게 열리는 자기 영역에 몰두하느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도 모르고 달려나가기도 하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장 활동의 공간에서 만나기는 하지만, 깊은 만남도 대화도 없는 자기만의 독백으로 변화되어 버렸다.

우리가 쉴 새 없이 지절거리는 작은 이야기들의 해방적/비판적 효과는 그것이 자기만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동안 늘 그렇듯이 또 하나의 게토를 만들며, 그리고 그 게토 속에서 자기동일성의 언어/제국의 언어로 그치고 말아 버렸다.

오순절 사건은 바벨의 사건이 만들어낸 이중적인 동일성을 뚫어내고 있다. 온갖 차이를 무시하는 제국의 언어도 자기 영역에서만 기능하는 게토의 언어도 아닌 제국과 게토를 넘어서는 소통을 오순절 사건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가는지 모르는 성령의 사건은 제국과 게토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기독학생운동은 그 운동의 본래의 성격인 소통과 대화의 힘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차이와 다름의 긍정은 그것이 소통을 전제로 할 때만에 가능한 것이며, 그 소통을 통해 삶의 세계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맘몬의 힘을 성찰하며 이를 넘어서는 대안적인 삶의 실천을 보여줄 때 가능한 것이다. 지난 시기, 우리는 맘몬의 힘을 넘어서기 위하여 사회과학적인 힘과 상상력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근대과학적인 담론 체계가 억압하는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있으며, 모든 것을 가장 객관적으로 명확히 보고자 한다는 근대과학적인 방법론 자체가 가지는 맹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후 근대과학적 담론을 넘어서는 작은 이야기들이 거대/메타 담론의 틈새를 비집고 올라서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작은 이야기들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일상세계의 성찰을 가능하게 하였다는 점은 주목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과 더불어 우리는 자본을 넘어서는 상상력이라는 이름하에 신비주의와 게토화된 소공체주의(에세네파)로 너무나 쉽게 채색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할 것이다.

과거의 기독학생운동은 당면한 한국사회 문제의 해결에 치중하였고, 또 자신들의 운동의 결과에 따라 한국사회에 급격한 변동을 하게 될 것이라는 종말론적 열정에 가득차 있었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의 변혁을 위해 자신들의 모든 것을 헌신하며 하나님 나라 운동에 자신을 내던졌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온 몸을 던지는 실천이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원동력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천이 변화된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일한 혹은 유효한 실천인가는 다양한 각도에서 탐색해봐야 할 것이다.

3. 지연된 종말론

오순절 사건을 경험한 초대 교회 공동체들은 예수가 보여주었던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예수의 운동을 경험했던 초창기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감에 따라 예수 공동체들은 종말이 곧 임박하지 않을 것이라는 깨닫기 시작하였다. 종말의 지연은 필연적으로 예수 운동을 하던 공동체들에게 새로운 신앙/신학적 성찰과 실천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의 이야기를 문서화하기 시작하고 이 문서를 통한 교육을 중요한 것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21 세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지연된 종말론에 따르는 신앙/신학적 실천에 대한 질문이다. 지연된 종말론은 우리의 운동이 한 순간에 불살라지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다시 돌아보게 하였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만 행해져야 하는 운동이 아니라면 그리고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이루어질 운동이라면 우리들의 접근방식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과거 기독학생운동은 '한국을 새롭게/민족공동체를 새롭게'라는 기치아래 에큐메니칼 정신에 입각하여 학원과 사회와 교회라는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증거하기 위하여 행진을 계속해 왔다. 이러한 고백적 신앙실천의 주제의식은 여전히 우리에게 유효한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현하기 위한 방식은 이제 보다 다차원적이고, 중층적이며, 자신의 전문영역을 확보하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바꾸어나가는 운동이 되어야만 한다. 엄혹한 시절에는 당면한 문제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운동이 되었다. 하지만 형식적 민주화를 거친 우리는 민주화의 실천이라는 것이 단지 형식적 민주화만이 아니라 급진적 민주화/다른 민주화를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민주의 제도만이 아니라 민주를 만들어내는 내 삶의 양식/실천/전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억압적인 체제가 저 밖에 어디에서 나를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내 속과 내 삶에서 나의 일상적인 삶을 통하여 구조화되고 체계화된다는 것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사회구조와 제도의 변화를 그렇게 목놓아 외치던 기독학생운동이 내 삶의 내밀한 체계와 실천을 다시금 전면에서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학생운동은 자신들의 삶 전체를 사회와 관련시켜 성찰하고 새롭게 삶의 방식에 대한 전환, 일상의 새로운 구성을 꿈꾸는 장구한 변혁을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삶의 방식에 대한 전환/일상의 새로운 구성이라는 테제는 90년대 문화연구 진영에서 이야기한 테제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테제들이 우리 삶을 새롭게 조망하는 언어로서 등장하자마자 현학화되고 강단의 언어로 전락해버린 것은 빈약한 성찰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모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기독운동 진영은 신앙고백적 실천/성찰적 실천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장구한 변혁을 새롭게 제기할 수 있는 좋은 기반과 토양을 가지고 있으며, 이미 기독학생운동이 가지고 있는 겹과 곱의 사고들이 이러한 실천들을 한층 풍성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고 할 것이다. 21세기 기독학생운동은 삶의 방식에 대한 전환을 이루어내는 운동이어야 한다. 이것이 일상적 삶의 영역 안에서 ‘거룩’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찾았던 바리새 운동이나, 폭력적 힘으로서 대항하려던 열혈당원의 운동이나, 세속세계의 더러움을 피해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에세네파나, 권력을 유지하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려 했던 사두개파들과는 다른 예수 운동의 독특성일 것이다. 이 세계를 떠나지 않으면서, 이 세계를 성찰하고, 이 세계안에 살면서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참여하며, 자기 동일성의 반복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거울을 깨트릴 타자에 주목하는 방식! 타자를 공대하는 방식의 하나로 예수 운동을 바라보는 것은 지연된 종말의 세계를 타고 넘어가는 하나의 방식이 될 것이다.

4. 현 시기 기독학생운동의 방식으로서의 생활신앙운동

어떠한 운동이던지 그 운동이 정체기에 들어서면 그 운동이 시작한 출발점을 성찰하게 된다. 운동의 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것만의 추구도 아니며, 옛 것의 고집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연암 박지원 선생은 ‘법고창신(法古創新)’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진실로 옛 것을 본받으면서도 변할 줄 알고, 새 것을 창안해 낼지라도 능히 전아(典雅)할 수 있다면 금문(今文)이 고문과 같아지는 것이다.” 전통을 본받으면서도 새로워질 수 있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면서도 전통을 따를 수 있다면, 새로운 문서라고 해도 그것이 고전과 같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법고창신의 정신으로 기독학생운동을 현 시기에 재구성하기 위해 지난 활동들을 간략하게 살펴보았다.(''간략하다'는 말은 과도한 단순화를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이며, 다른 시각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여기서는 이러한 성찰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몇 가지의 디딤돌을 놓으려 한다.

기독학생운동은 단지 학원이라는 현장에 자신이 몸담고 있을때만 행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지는 ‘장구한 혁명/변혁’(레이몬드 윌리암즈)을 꾀하는 운동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시기” 기독학생운동은 ‘장구한 혁명’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운동적 삶, 혹은 대안적 삶을 모색하며 이를 경험하는 운동으로서의 출발점과 토대를 마련하는 운동으로서 전환되어야 한다. 현실에서 요구되는 다양한 사건들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치지 않으면서 평생을 운동적인 삶으로 연결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학생운동은 대안적 삶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교육을 운동의 전면에 부각시켜야 할 것이다. 과거에 기독운동을 폄하하면서 전문성을 지니지 못한 백화점식 운동, 혹은 나열식 운동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현시기에는 이러한 백화점식 운동을 오히려 전문적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전문적인 백화점 운동은 다양한 형태의 대안적 삶을 경험하도록 도와주는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학생시절을 통하여 한국사회/학원/교회/우리를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하여 자신이 평생토록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영역의 운동을 경험하고 발굴하며, 전문화시켜나가며 이것이 자신의 신앙과 동떨어지지 않는 기초와 토대를 마련해가는 일련의 과정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렇게 일상과 신앙이 괴리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운동을 ‘생활신앙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본디 신앙이라는 말이 "일련의 믿음과 확신일 뿐 아니라, 믿는 것에 대한 결단력 있는 행동과 지속적인 태도"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신앙은 자신의 일상적인 생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신앙이라는 말은 사실상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이다. 하지만 언어의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상황을 통해서 새롭게 재/구성되어진다는 점을 이해한다면, 신앙과 생활신앙은 일정하게 서로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신앙이 어떤 고정된 혹은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처럼 이해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소유하게 되면 만사가 보장되는 어떤 것? 입으로 시인하면 보장되는 천국? 정확히 이렇게 이해하지는 않았겠지만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의미로 이해하고는 있지 않았을까?

‘주일만 기독교인(Sunday Christian)’이라는 태도는 신앙을 이렇게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신앙, 이 글에서 말하는 생활신앙이란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일련의 움직임으로 이해할 때 ‘기존에 이해하던’ 신앙과는 ‘다른’ 신앙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신앙은 '움-직-임'(운동)으로서만이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생활신앙운동’이라는 말은 본디 ‘신앙’이라는 말이 ‘어떠한 삶의 방식/스타일’이라는 것을 드러내보여주는 것이다. 생활신앙운동이란 말/언어로 표기되지 않는 나의 표현, 내가 하는 말/언어, 나의 작업, 내가 사는 인생 등을 통해 우리 삶의 대안적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의미와 가치의 제조자라는 점에서 단순한 전통의 반복이 아니라 전통의 전복을 통해 전통의 복원을 꾀한다는 점에서 기독학생운동의 새로운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이러한 생활신앙운동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성격을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당대의 기독교신앙실천에 대한 당대의 물음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늘 시대적 한계를 태생적으로 내장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에서 기독교 신앙실천에 접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성격이 부각되어질 것이다. 앞으로 제시하는 성격은 기독학생운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 시기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5. 성찰 - 낯선 것과 마주치기

생활신앙운동의 성찰적 성격은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십계명의 제1계명인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표준 새번역, 출19:3, 신5:7)는 계약을 성찰의 기본근거로 삼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1계명은 우리가 판단을 내리는 모든 근거들에 대한 메타비판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 계약은 나/우리의 생활 전체가 무엇에 의해 움직여가는가를 그 근원에서부터 성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학원에서 우리의 공부와 활동이 무엇에 의해 방향이 설정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기독학생이라는 우리 활동의 방향은 상식적으로 파악되지 않는 곳에서 상식적으로 구성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한다. 또한 이 첫 번째 계명을 인문학적으로 밀고 나간다면 이는 우리가 확신하던 모든 것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는 사실임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경험하고, 알고 있는 것들의 상대성/제한성/한계성을 알아차리는 것! 그리고 이러한 성찰성을 급진적으로 밀고나가게 되면 내가 전제로 한 모든 것들에 대한 검토를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은 그 신앙이 가진 역동적인 힘에 의해 '기독교' 신앙이라는 전제마저 재검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동안 자신이 알게 모르게 한국교회와 자신의 생활의 합리화를 전제하고 받아들였던 신앙을 검토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의 근거는 마틴 루터가 말하였듯이 “성서와 이성”이 될 것이며, “전통(에 대한 재해석)과 체험(낯선 조우)”을 통해 확장되고 보완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신앙을 근원에서 근기있게 재검토할 때 '기독교 신앙'의 급진적이며 전복적인 성격, 그래서 구원이라는 가능성, 혹은 그 기미를 설핏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생활신앙의 성찰적 성격은 한국사회/학원/교회가 신앙실천의 장이라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성찰'을 자신의 기본 성격으로 가진다는 독특성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성찰 신앙은 자신의 확신을 시의적절하게 재검토하고 재점검하는 일련의 판단과정(인식적/도덕적/ 미적)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신앙운동의 성찰적 성격을 KSCF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KSCF의 정체성은 자신이 특정시기에 어떤 단위에 소속되어 있고, 있었는가가 그 골간을 차지하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전생애를 통하여 생활신앙운동을 펼쳐나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KSCF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활신앙운동의 성찰적 성격은 기존 KSCF의 정체성을 해체하면서 새롭게 재구성하는 효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의 연맹과 단위의 즉각적인 해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주지해야할 것이다.

6. 참여 - 불안과 더불어 희망하기

생활신앙운동은 그 운동이 지속화되기 위해서는 문제/사건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제/사건에의 만남, 혹은 생성을 말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생활신앙운동이 가지게 되는 성찰성이 갖게 되는 어떤 형태의 '거리 두기(괄호 넣기)'를 뛰어 넘기/타고 넘기 위한 것이다. 즉, 생활신앙운동의 성찰성이 '거리 두기'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한다면, 참여적 성격은 이러한 성찰성이 만들어내는 어떤 효과를 인지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혹은 타고 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적절한 예시는 아니지만 문화연구에서 말하는 '참여적 관찰'이라는 것이 이러한 방식에 대한 어떤 참조점이 될 것이다. 어떤 운동에 대한 비평적 거리두기가 아니라 그 운동에 참여하며 그 운동을 통하여 삶/사회를 바꾸어내는 것. 이러한 참여적 성격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과 더불어 희망하기'라고 생각한다. 불안과 더불어 희망하기란 자신을 비우시고 이 땅에 성육(成肉)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빌 2:6-7) 생활신앙운동의 참여적 성격이 이렇듯 자기를 비우면서 드러난다는 것은, 맘몬의 시대에 교환의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뢰를 통한 증여 혹은 개입의 양식으로 품성함을 일구워내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가진 한계 때문에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여우의 포도”가 아니라 시간을 통해 지며리 익힌 후에 생성되는 어떤 “영성적 울림”이 될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삶속에서 우리는 당시의 시대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면서, 불완전함, 약함, 소외, 타자 등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방향의 삶의 양식을 조형하면서 “영성적 울림”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러한 삶은 자기동일성의 반복적 재생산/자기 차이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 세계와 사회 속에서 주체적으로 참여하지만, 우리의 확신이 하나님의 빛에서 올바른 신앙실천이었나를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생활신앙운동의 참여적 성격은 바로 생활신앙운동의 성찰적 성격, 즉 이러한 확신과 불안이 교차하고, 섭동하는 가운데 그려지는 어떤 무늬일 것이다.

7. 소통 - 심연속의 도약 혹은 목숨을 건 도약

생활신앙운동의 소통적 성격은 이 운동이 신앙실천에 대한 상호 이해와 공동모색을 추구하는 신앙운동임을 말한다. 소통적 성격은 성찰성이 급진화되고, 참여적 성격과 마주치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생활신앙운동의 성격일 것이다. 자신이 수행하는 실천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자신의 전제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자신의 인식과 실천의 상대성을 발견하는 데에 이를 것이며, 삶을 통해서 '불안과 더불어 희망하기'를 계속 수행하는 과정은 상호 이해와 공동 모색에 이르게 될 것이다. 마가 다락방의 오순절의 성령사건(행 2:1~13)에서 소통의 어떤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열린 대화의 과정은 자기 동일성의 반복/자기 차이성의 생산만을 해내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마주치는 과정에서 생성하게 되는 것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은 타자에 대한 ‘사유’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신-절대 타자’라는 지평은 사유의 지평을 돌파할 수 있는 어떤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절대타자라는 지평을 통하여 우리는 인식론적 차원이 아닌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수반하는 것이지만, 이 감수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어렵사리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통이란 ‘규칙을 공유하지 않은 이질적인 사람들이 만나는 일’이며, 이러한 소통공간이 마련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알게된다. 그래서 소통은 사적인 규칙을 미래로 투사하여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심연속의 도약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은 의미의 교환이나, 확장이 아니라 몸을 심연 속으로 내던지는 것이며, 경계 바깥으로 몸을 끌고 나가는 지속적인 어떤 버릇이나 태도를 말한다.

Outro : 혼자서 함께 여행하기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인 스티브 도나휴가 쓴 “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스티브 도나휴는 인생을 바라보는 두 가지 은유를 말하고 있다. 하나는 산을 오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막을 건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눈 앞에 보이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며, 목표를 설정하고 계획을 실행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을 말한다. 사막을 건너는 것은 목표가 명확하기 보다는 애매모호하며,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하며,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이러한 등산과 사막횡단이라는 은유는 기독학생운동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80년대까지의 기독학생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의 한 과정으로서 ‘한국 사회의 민주화’라는 눈에 보이는 산 꼭대기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 선배들은 숨이 턱턱 막히는 깔딱 고개를 참고 넘어갔으며, 이 과정 속에서 무수히 많은 길들을 통해서 등산을 하고 있던 산악인들의 모습을 보고 자연스럽게 함께 등산하는 사람들의 연대감이 형성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90년대를 경과하면서 기독학생운동은 이전처럼 눈에 보이는 목표를 볼 수 없게 된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과 같은 것이 되었다. 등산을 할때는 얼마나 준비가 잘되어 있는지, 계획은 잘 세웠졌는지, 그리고 경험을 해보았는지의 여부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사막을 횡단하는 것은 산을 타는 것과 같은 목표 지향적인 삶의 접근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법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은 산꼭대기와 같은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서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원칙과 방향을 가지고 목적지보다는 여정 자체에 중점을 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치료하기 곤란한 병을 지닌 사람이 삶을 대하는 자세와 같은 것이다. 난치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병을 치료한다는 목표 달성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어떻게 하면 그 난치병을 지닌 채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최대의 과제로 떠오르게 된다. 난치병은 정말 가혹한 병이지만 우리에게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라고 가르쳐주는 훌륭한 선생님의 역할을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시대적 상황은 기독학생운동이 삶의 자세와 태도를 변화시키는 운동으로 전환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멀리 보이는 목표를 잡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방식을 잘들여다보고 그것 자체를 즐기며 충실하게(의미있게) 살아가려는 삶의 버릇을 만들어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오늘날 기독학생운동이 가져야 하는 현명한 실천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막을 여행하는 도중에 우리들은 시시때때로 눈 앞에 산을 마주대하게 될 때가 있다. 이때는 그 산을 오르내려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등산과 하산의 과정은 사막횡단이라는 긴 여정가운데는 순간적인 일인 것이다.

우리는 사막을 여행하는 가운데 우리 스스로 방향을 찾아야 하고, 전진하고, 스스로를 돌보고, 자아와 싸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항상 혼자일 수는 없다. 우리는 정신적인 지원, 친구들, 길잡이,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서로서로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막을 횡단하다보면 우리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오아시스에는 사막횡단에 필요한 다른 정보를 지닌 여행객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들과 함께 하면서 우리는 기대치 않은 즐거움을 맛보게 되기도 한다. 예기치 않은 오아시스를 만난다는 것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지면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오아시스를 정상으로 가는 도중에 마주치는 방해물이나 훼방꾼 또는 장애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그냥 무시하거나 제거해버리려고 애를 쓰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막을 횡단하는 우리들에게는 의도하지 않은 방해물이나 장애물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이 혹시나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오아시스가 아닌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90년대에 우리들은 사막을 횡단하는 유목민들처럼 혼자 여행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바람에 의해 눈앞에 산이 깊은 골짜기로 변하는 사막 한가운데 있음을 실감하게 되면서 이 사막을 함께 건너고 있는 다른 여행객들을 만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학생운동을 계속 해나간다는 것은 함께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객들이 혼자서 여행을 하다가도 오아시스에서 함께 만나기도 하고, 또는 앞서가기도 하고 뒤쫓아가가기도 하는 기나긴 여정일 것이다. 이 여정 가운데에서 우리는 혼자, 그리고 또 함께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우리 삶을 성찰하고 소통하는 연대를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늘 혼자 여행하고 있다는 소외감도 늘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넘어서 유혹과 위협으로 다가오는 여러 차이에 솔직해지고, 그 긴장을 오래참고, 이를 풀어가는 집요한 과정에서 성숙한 기독학생운동을 풀어나갈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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