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송년편지

사무국 이야기 조회 수 8139 추천 수 0 2009.12.18 14:23:18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열왕 1, 19,11-12)

 

 

얼마 전에 가장 엄격하기로 유명한 봉쇄수도원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알프스의 깊은 계곡에 자리잡은 카르투지오 봉쇄수도원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이 수도원은 1688년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된 이후에 한번도 외부 사람들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 영화를 찍은 필립 그로닝 감독은 1984년 촬영 신청을 했다가 ‘아직 때가 아니다, 좀 생각해보겠다’는 이유로 반려되었고, 그후 15년이 지난 1999년에 ‘이제 준비가 되었다’라는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단, 인공적인 조명이나 음악을 사용하지 말 것, 수도원에 대한 논평이나 해설과 같은 나레이션을 쓰지 말 것, 촬영를 위한 다른 보조자들 없이 감독 혼자 들어올 것, 영화의 첫 공개는 영화제에서 할 것 등의 조건을 달았다고 합니다. 영화 감독은 이러한 조건에서 수도원의 사계를 담기위해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2시간 42분의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19군데에 있는 이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은 하루 한끼만 먹으며 기도, 연구, 식사, 취침등의 대부분의 일상생활을 각자의 독방에서 해결한다고 합니다. 하루 3번 모여 함께 기도와 예배를 드리는 때와 일주일에 한 번 대화가 허용되는 4시간의 산책 시간이외는 침묵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시간의 산책동안에도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을 주거나 받을 수도 없으며 말을 걸어서도 안됩니다. 그로닝 감독은 수도사들과 같은 생활 방식을 따르며 2년이라는 기간 동안 6개월을 수도원에 머무르며 겨우 하루 두 세시간만 영화를 촬영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한된 환경에서 감독은 수도사들의 생활을 직접 체험하면서 수도사들의 일상을 화면에 담게 됩니다. 이 영화는 162분 내내 아주 제한된 소리를 제외하고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수도사들이 정해진 시간마다 함께 모여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거나, 기도를 할 때, 산책시간에 하는 대화나, 또 필요에 의한 짧은 말들 이외에는 다른 말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만 수도사들이 혼자 독방에서 조용히 기도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 때로는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 식사를 준비하거나 채소를 재배하는 모습 등의 반복되는 사계의 일상들 속에서 생겨나는 아주 작은 소리들만이 화면을 통해 나지막하게 울려 나올 뿐입니다.

막스 피카르트가 <침묵의 세계>라는 책에서 침묵은 ‘수익성’이 없고, ‘효용성’이 없고, ‘생산성’이 없기 때문에 현대 세계에서 사라졌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지적은 바로 현대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살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이익이나 효과, 생산을 수행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가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익, 효과, 생산으로 환원시켜 버린 현대의 인간은 자신의 영혼마저도 자본주의 체계의 한 부속으로 여기거나, 아니면 이미 자본주의적인 가치와 교환해버린 것인지도 모릅니다. 영화에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는 자막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처음에 이 자막을 볼 때는 그저 상투적인 인용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수도사들의 일상이 빚어내는 무늬와 반복해서 나오는 이 말씀이 어우러지면서 점점 더 큰 울림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유용을 자처하며, 성공을 자처하며, 구원을 자처하며 울리는 큰 꽹가리 소리로는 도저히 불러 일으킬 수 없는 공명을..... 철학자 김영민은 <동무론>이라는 책에서 ‘무능의 급진성’을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 무능하고, 가치없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히려 더 근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미래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말입니다. ‘무능의 급진성’을 이 다큐멘타리의 말미에 소경 수도사의 입을 통해 이렇게 전합니다. “나의 눈이 먼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언어가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비로소 보기 시작한다’라는 짧은 경구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새겨져 있습니다. 지난 1년을 되돌아보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를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혹시나 수많은 언어들 속에서, 효용과 생산만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오히려 말들이 사라진 일상 가운데 ‘숨어 있는 신’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었는지 말입니다. 다가오는 새로운 한 해는 기독학생들과 더불어 실리와 유용을 넘어서 성숙한 존재의 대지를 만나고 이 대지에서 저희들이 함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저를 이끄시어, 제가 여기에 있나이다”라고.

 

 

 

2009년 대림의 계절에

김오성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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