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 풀이하는 예수운동 이야기 - 김남주 시인에 기대어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옛 마을을 지나며

 

찬서리

나무 끝을 날으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을 지나며’, 나의 칼 나의 피97.)

 

시인은 찬서리 나무 끝에 달린 홍시 하나의 까치밥에서 조선의 마음을 읽는다. 어찌 보면 별것도 아닌 홍시 하나에서 나누고 베풀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을 느끼는 시인의 마음이 수정처럼 맑다.  

 

하지만 그게 어찌 조선의 마음일 뿐이랴.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민중의 마음이 그러하리라. 우리는 성서에서도 이스라엘 민중의 그런 착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이삭을 밭에 남긴 채 잊고 왔거든 그 이삭을 집으러 되돌아가지 말라.... 올리브나무 열매를 떨 때, 한 번 지나간 다음 되돌아가서 가지들을 샅샅이 뒤지지 말라.... 포도를 딸 때에도, 한 번 지나간 다음 되돌아가서 다시 뒤지지 말라. 그것은 떠돌이나 고아나 과부에게 돌아갈 몫이다(신명 24:19-21).

 

그렇다. ‘과부 사정은 과부가 안다, 가난이 뭔지를 몸소 체험하는 민중들이야말로 나눔과 베풂의 소박한 삶의 지혜를 안다. 그들에게 나눔은 고상한 이론이 아니라 고단한 살림살이에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인정(人情)의 끈이요, 삶의 희망을 지켜 가는 원동력이다.

 

자유를 찾아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절박한 생존의 위기 속에 광야를 유랑하던 히브리 민중들에게 요긴한 음식이 되었을 만나와 메추라기이야기를 보도하면서, 성서 기자는 모세는 그들에게 먹고 남은 것을 그 다음날을 위하여 남겨 두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런데 모세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이 남겨 둔 것에서는 구더기가 끓고 썩는 냄새가 났다. 모세는 그들에게 몹시 화를 냈다는 해설을 살짝 덧붙인다(출애 16:19-20).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죽음의 땅 광야에서 변변치 않은 음식이나마 내일의 양식으로 챙기는 것은 당연지사일 텐데, 신명기 기자는 왜 그런 행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가? 그것은 앞으로 히브리 민중들이 건설해야 할 새 세상에서는 물질의 축적이나 독점은 단호히 거부되고, 공평한 나눔이 새 세상의 일상적 삶의 질서가 되어야 한다는 준엄한 가르침이 아닌가.

 

예수는 어린 시절부터 히브리 민중들의 마음을 이야기로 듣고 또 생활 주변에서 목격했을 것이다. “일용할 양식”(마태 6:11; 누가 11:3)이 절박한 문제로 대두되는 절대빈곤의 갈릴리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밥 한 그릇, 떡 한 조각, 밀가루 부침개 한 장이라도 이웃과 나눠 먹을 줄 아는 그들의 인정 어린 삶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는 나눔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참으로 소중한 인간적 가치임을 가슴 한 구석에 남몰래 새겼을 것이다.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거리낌없이 밥상 공동체를 이룬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마태 9:11; 마가 2:16; 누가 5:30). 밑바닥 민중의 아들인 예수는 어려서부터 늘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운동의 길에 들어서서도 자연스레 민중들과 개방적인 식탁 친교를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율법과 사회적 차별의식 때문에 죄의식과 열등감과 소외감에 짓눌려 살던 민중들은 예수와의 이런 친밀한 인간적 교제를 통해 , 나도 하나의 소중한 인격체이구나하는 인간으로서의 자존심과 삶의 희망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마가 6:35-44) 이야기도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적은 음식이 기적적으로 불어난 증식기적이 아니라, 적은 분량의 보잘것없는 음식이나마 많은 사람이 사이좋게 나눠 먹은 나눔의 기적이었을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웬 아이가 보리빵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요한 6:9)고 말하는데, 아마도 자기 음식을 아낌없이 내놓은 아이의 행동에 자극을 받아 다른 사람들도 부끄러운 나머지 꿍쳐 두었던 음식을 다 내놓아 많은 사람들이 조금씩이라도 골고루 나눠 먹은 나눔의 기적이 일어났던 게 아닐까.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성서의 보도는 새빨간 거짓말이 아니다. ? 예수를 좇아다니느라 저녁”“이미 늦은 시각까지”(마가 6:35) 쫄쫄 굶었을 많은 사람들의 배를 채우기에는 음식이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대신 그들은 나눔의 기적을 통해 음식보다 더 귀한 사랑으로 배불렀을 테니까.

 

예수운동은 독점이 일상화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대안으로 나눔을 조직적으로 실천하는 운동이다. 따라서 예수운동의 주체는 모름지기 나눔의 소중한 인간적 가치를 몸으로 느끼는 풀뿌리 민중들일 수밖에 없으니,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누가 6:20)라는 예수의 말씀의 행간에 담긴 뜻이 바로 그것이리라.

 

 

2. 가엾은 리얼리스트

 

시골길이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고

촌뜨기 시인인 내 눈은

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이라는 내 친구는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르고

농부의 자식인 내 가슴은 제방 이쪽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뿌리가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른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

나는 어쩔 수 없는 놈인가 구차한 삶을 떠나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는 없는 놈인가

(‘가엾은 리얼리스트全文)

 

시골길이 처음인 친구가 흔해빠진 아카시아 향기에도 넋을 잃을 때, “촌뜨기 시인꽃그늘에 그늘진 농부의 주름살을 본다.” “바닷가가 처음인 친구가 낙조의 파도에 사로잡혀 몸둘 바를 모를 때, “농부의 자식인 시인은 가뭄에 오그라든 나락잎에서 애를 태운다.” “가난한 시대의 가엾은 리얼리스트인 시인은 구차한 삶을 떠나 밤별이 곱다고 노래할 수 없.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진리다. 생활이 넉넉한 도시인들은 농촌을 낭만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예찬하기 쉽다. 하지만 농민들과 그들의 자식들에게 농촌은 처절한 삶의 현장일 뿐이다.

 

갈릴리의 청년 예수도 시인과 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갈릴리는 땅이 비옥해서 농업이 생업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수확되는 풍성한 농산물은 유대 지방, 특히 예루살렘의 생명선과도 같았다. 유대 지방은 척박한 땅과 농사를 짓기에는 부적절한 기후 때문에 식량의 자급자족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갈릴리 지방에는 소농과 땅 없는 소작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갈릴리 농민들은 뼈빠지게 농사를 짓고도 수확의 대부분을 지주들에게 빼앗겨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 그래서 모진 가난을 견디지 못해 자진해서 홀로 또는 모든 식구가 농노로 전락하는 일이 속출했다. 이렇듯 비참한 갈릴리의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자랐을 예수가 어찌 농촌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예수는 리얼리스트였다. 예수는 가난한 시대의” “구차한 삶을 등진 채로 허황된 꿈을 꾼 관념적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지만 현실을 적당히 외면한 채로 밤별이 곱다고 노래하는 낭만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믿음이 깊었지만 그 믿음 때문에 종교적 관념주의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십중팔구 농부의 자식이나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을 예수, 그리고 몸소 농부나 육체노동자로 잔뼈가 굵었을 예수는 자기 앞에 펼쳐진 적나라한 삶의 현실을 안고 몸부림친 리얼리스트였다.

 

예수는 공중의 새들들꽃을 보면서 하염없이 낭만에 젖지 않는다.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 들이지 않아도되는 새들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아도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보다도 더 화려하게 차려 입들꽃을 보면서, 시인 예수의 상상력은 나날의 의식주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닿는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마태 6:25-34)는 말씀은 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민중들의 고단한 살림살이를 배경으로 하는 게 틀림없다.

 

 

3.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마을 앞에 개나리꽃 피고

뒷동산에 뻐국새 우네

허나 무엇하랴 꽃 피고 새가 울면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없다면

 

시냇가에 아지랑이 피고

보리밭에 종달새 우네

허나 무엇하야 산에 들에

쟁기질에 낫질 하는 총각이 없다면

 

노동이 있기에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

산과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산에 들에 쟁기질 하는 총각이 있기에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다네

(‘나물 캐는 처녀가 있기에 봄도 있다’, 솔직히 말하자20.)

 

시인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다. 하지만 시인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주책없이 빠져들지는 않는다. 시인의 눈에는 자연인간이 마냥 겹쳐 보인다.

 

산에 들에 나물 캐는 처녀가 없다면” “마을 앞에 개나리꽃 피고 뒷동산에 뻐국새운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산에 들에 쟁기질에 낫질하는 총각이 없다면” “시냇가에 아지랑이 피고 보리밭에 종달새지저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물 캐는 처녀쟁기질하는 총각”, 자연에 가하는 인간의 노동이 있기에비로소 산도 있고 들도 있고 꽃 피고 새가 우는 봄도 있는 것을.

 

청년 예수도 그렇다. 예수는 하늘을 맴도는 참새에 잠시 눈길을 준다. 하지만 예수의 시선은 곧바로 참새 너머 인간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하찮은 참새 한 마리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법이거늘, 그렇다면 아버지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다고 인간 생명의 존엄을 노래한다(마태 10:29-31).

 

예수는 어느 안식일에굶주린 제자들과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서슬 시퍼런 안식일 금지조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밀이삭을 싹둑 잘라먹는다. 예수의 이런 행동에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마가 2:23-28). 배가 고프면 뭐라도 먹어야 하는 인간의 타고난 권리, 민중의 신성한 생존권을 억누르는 법이나 제도를 예수는 가차 없이 깔아뭉갠다.

 

이렇듯 예수의 사고의 중심에는 사람”, “노동하는 사람, 땀흘려 일해도 제대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민중이 자리잡고 있다. 예수는 이 노동하는 민중의 시각으로 자연과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예수는 민중 위에 군림하는 모든 권력과 제도와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힘차게 맞서 싸운다.

 

예수는 사람들의 감탄을 절로 자아내는 웅장한 건물들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성전 헌금궤가난한 과부가 자신의 생활비모두인 랩톤 두 개를 바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가슴이 찢어진다. 그래서 예수는 민중의 고혈을 짜내는 성전 체제를 무너뜨리고야 말리라고 비장한 결의를 다진다(마가 12:41-13:2). 그리고 결국 예수는 성전 체제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십자가에 처형된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하나님이 태초에 예정하신 인간 구원 드라마의 각본에 따른 것이 아니라, 민중의 인간적 권리 회복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의 불가피한 귀결이었다.

 

예수운동을 종교적 관점에서만 해석하려 드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운동은 참된 인간의나라를 소망하는 민중 예수와 민중들이 협력하여 이루어가는 노동”, 역사의 추운 겨울을 역사의 따스한 으로 변화시키는 노동이다. 말과 기도만으로써가 아니라 몸으로 행동으로 싸움으로 밀어붙이는 노동이다. 고장난 역사의 수레바퀴를 올바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죽을 각오로 대드는 사회적 노동이며 역사적 해방실천이다.

 

 

4. 자유

 

만인을 위해 내가 노력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사람들은 맨날

밖으로는 자유여, 동포여, 형제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제 자신을 속이고서

(‘자유’, 나의 칼 나의 피54.)

 

시인은 노래한다.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그래서 시인은 밖으로는 자유여, 동포여, 형제여! 외쳐대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는 사람들을 매섭게 질타한다. 자유의 나무는 를 먹고 자라며, 진정한 자유의 열매는 만인이 함께 나누는 것임을 시인은 깊이 인식하고 있다.

 

청년 예수도 그랬다. 예수는 바람처럼 주체적 자유인의 삶을 살려고 애썼지만, 그 자유는 제멋대로의 방종한 자유가 아니라 성령안에서의 자유였다(요한 3:8). 예수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민중해방을 실천하는 데서 샘솟는 자유밖에 몰랐다(누가 4:18-19).

 

예수가 누렸던 자유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요한 10:10)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요한 10:15) 자유였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요한 10:18). 이 말씀에는 이리 떼들과 같은 사악한 세력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양들과 같은 민중들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자기 삶의 신성한 권리라는 예수의 자의식이 담겨 있다.

 

그리고 예수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도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요한 8:31-32). 무슨 말인가? “진리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라는 것, 예수의 진정한 제자라면 민중해방 실천의 삶 가운데서 비로소 인식되는 그런 진리의 차원에까지 가닿아야 한다는 얘기다. 예수에게는 민중해방 실천의 삶이 없이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신비하고 초월적인 진리 개념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이 땅의 대다수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원죄(原罪)의 저주로부터의 자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의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속(代贖)하는 신비스럽고 종교적인 의미의 죽음으로 이해될 뿐이다. 오늘날 이 땅의 소위 정통기독교는 대속적 기독론의 틀 안에서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종교적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비판을 면키 어렵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 즉 민중들의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치다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은 것으로 보도되는데, 이 단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예수를 관념적 교리와 신학의 틀로 이해하려 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인간의 자유를 쟁취하려는 운동에 몸바친 예수의 모범을 본받지 못하는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인을 위해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이 땅의 신자들은 시인의 이 외마디 선언에 귀기울여야 한다. “만인을 위해 싸우지 않고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죄에서 자유케 된다는 이기적이고 마술적인 신앙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만인을 위해”, 즉 신자와 비신자, 유신론자와 무신론자, 남성과 여성, 부자와 빈자, 노동자와 농민과 도시빈민을 포함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회복을 위해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않는 교회는 예수의 교회일 수 없다. 입술로는 예수를 말하면서도 안으로는 제 잇속만 차리고들 있는 상업화된 교회가 예수의 십자가를 버젓이 간판으로 내거는 것은 몰염치한 일이다.

 

 

5. 그러나 나는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하는 금()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 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곳에

 

말하자면 나는 이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근심 걱정 잠 안 오고

춘하추동 사시장철 뼈빠지게 일을 해도

허리 펴 느긋하게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

맘 놓고 허리 풀어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한숨으로 지새는 사람들과 함께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고

나라로부터 받아본 것이라고는

납세고지서 징집영장밖에 받아 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조국은 하나다46.)

 

시인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시인도 마음만 먹었으면 남들처럼 세속적 출세의 길을 달려갈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시인은 면서기가 되어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도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한다는 금()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이 되어 주지도 못했다.” 시인은 늘 변함없이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머물고자 했다.

 

인간적인 의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 명료하다. “착취와 억압이 있는 바로 그곳을 자기 삶의 터전으로 삼는 것, 그래서 춘하추동 사시장철 뼈빠지게 일을 해도 허리 펴 느긋하게 한 번 쉬어보지 못하고 맘 놓고 허리 풀어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평생을 한숨으로 지내는 사람들과” “함께살아가는 따뜻한 민중사랑 실천이다. 시인은 이 인간적인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의 세속적 욕망에 재갈을 물렸다. 이것이 시인의 생의 단순하고도 매서운 결단이었다.

 

청년 예수도 그랬다. 예수는 홀어머니 밑에 올망졸망 딸린 형제자매들을 떠나 운동의 길에 나서기까지 오랜 세월 피를 말리고 뼈를 깎는 고뇌를 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결국 예수는 나이 서른 살 가량 되어 인간적인 의무에 충실하고자 출가(出家)를 감행했다. 당시로서는 나이 서른이면 적지 않은 나이였는데, 그 나이가 되어서야 예수가 출가라는 모진 결단을 했음은 의미심장하다.

 

4복음서 가운데 예수운동의 민중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마가복음에서는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오셔서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하셨다”(마가 1:14-15)고 간략하게 총괄 보도하고 있지만, 우리는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이 짧은 구절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 예수운동이 민중적 예언자 요한이 잡힌 뒤에민중의 땅 갈릴리에서 시작되었음은 그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예수가 사랑하는 가족의 품을 떠나 이런 운동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하나 둘 통과했을 내면적 고뇌는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예수가 출가한 것을 알았을 때,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고통스러웠을 것이다(누가 2:34-35). 예수의 동생들도 한동안 깊은 슬픔과 절망에 잠겼을 것이다. 아버지 요셉이 세상을 떠난 뒤 더욱 믿고 의지했을 장남 예수가 홀연히 자신들의 곁을 떠났으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허전하게 느껴졌을까.

 

예수가 운동의 길에 들어선 후에도, “예수의 형제들훌륭한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좋겠다고 예수에게 권했다. 그들은 예수가 운동을 통해 뭔가 이익을 챙기기를 은근히 원했다. 하지만 그런 피붙이 형제들을 향해 예수는 말한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요한 7:1-7). 예수는 사악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운동을 자신의 길로 인식했다.

 

내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착취와 억압이 있는 바로 그곳에늘 머물고자 했으며 그런 의무를 집단적인 민중운동으로 표출했던 예수.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을 짓밟는 착취와 억압의 세력에 앙칼지게 대들다가 마침내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 예수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으로 고백하는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과연 그 을 얼마나 성실히 걸어가고 있는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해도, 만일 우리가 민중사랑과 민중해방 실천이라는 본질적인 인간적인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우리는 마지막 날에 주님으로부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불호령을 듣게 될 것이다(마태 7:21-23).

 

 

6. 함께 가자 우리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자

뒤에 남아 먼저 가란 말일랑 하지 말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일이면 일로 손잡고 가자

천이라면 천으로 운명을 같이 하자

둘이라면 떨어져서 가지 말자

가로질러 들판 물이라면 건너주고

물 건너 첩첩 산이라면 넘어주자

고개 넘어 마을 목마르면 쉬어가자

서산낙일 해 떨어진다 어서 가자 이 길을

해 떨어져 어두운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언젠가는 가야 할 길

누군가는 이르러야 할 길

가시밭길 하얀 길

에헤라, 가다 못 가면 쉬었다나 가지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나의 칼 나의 피44.)

 

민중해방의 길은 많은 사람이 걷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달픈 가시밭길이다. 그래서 그 길은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함께 가야 하는 길,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내가 넘어지면 네가 와서 일으켜주,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운명을 같이 하는 힘겨운 전사(戰士)의 길이다.

 

그 길에는 세상 사람들의 몰이해와 비웃음, 일상화된 지독한 가난, 매스컴의 조작된 보도와 거짓 소문 유포, 정치적 박해와 투옥과 고문, 그리고 어쩌면 죽음의 그림자마저 드리워 있다. 그래서 그 길에 발을 들여놓는 사람들이 적을 뿐만 아니라, 얼마 동안은 그 길을 나름대로 성실히 걷던 사람들도 어느 시점에서는 변절하거나 적당히 발을 빼는 게 보통이다.

 

예수운동의 길도 그러했으리라. 예수는 그 길이 좁은 문이라고,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험해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고 말한다(마태 7:13-14). 예수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는”(마태 6:24) 그 길에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리라고 섣부른 기대를 하지 않는다.

 

예수는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용기를 부리는 어떤 사람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말한다. 예수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는 한 사람에게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누가 9:57-62). 아마 그들은 예수를 따르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가슴 섬뜩한 선언을 한다(마가 8:31-34).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는 예수운동에 동참할 수 없다는 얘기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마태 18:19-20)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가 수천, 수만, 수십만이 아니라 겨우 단 두세 사람을 거론하고 있는 이유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는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파견하면서 여행하는 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 먹을 것이나 자루도 가지지 말고 전대에 돈도 지니지 말며 신발은 신고 있는 것을 그대로 신고 속옷은 두 벌씩 껴입지 말라고 분부한다(마가 6:6-9). 이것은 예수운동의 철두철미한 민중적 성격을, 그리고 진정한 운동가는 대중과 긴밀히 접촉하는 가운데 대중의 신뢰와 애정을 받으며 살아가는 법을 체득해야 함을 넌지시 시사한다.

 

우리는 예수의 이렇듯 다양한 말씀에서 교회란 무엇인가하는 물음을 새삼 던지게 된다. 예수의 몸된 교회, 즉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신격화하기보다는 예수의 정신과 삶을 자신의 몸으로 살아내는 것을 본질적인 정체성으로 하는 교회가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진정한 전도와 복음 선포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민중해방 실천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아 자신들도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엮어 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일이다.

 

비록 숫자는 얼마 되지 않더라도 끈기 있게 예수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7. 돌멩이 하나

 

하늘과 땅 사이에

바람 한 점 없고 답답하여라

숨이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던 날

친구와 나 제방을 걸으며

돌멩이 하나 되자고 했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날 저물어 캄캄한 밤

불씨 하나 되자고 했다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그때 나 묻지 않았다 친구에게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나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돌멩이 하나全文)

 

시인은 벗과 맹세한다. “강물 위에 파문 하나 자그맣게 내고 이내 가라앉고 말 그런 돌멩이 하나”, “풀밭에서 개똥벌레쯤으로나 깜박이다가 새날이 오면 금세 사라지고 말 그런 불씨 하나되자고.

 

그러면서도 시인은 벗에게 묻지 않는다. “돌에 실릴 역사의 무게 그 얼마일 거냐고”, “불이 밀어낼 어둠의 영역 그 얼마일 거냐고.” 시인은 다만 죽음 하나 같이할 벗 하나 있음에” “그것으로 자랑스러웠다.”

 

그렇다. 세상은 시인에게 민족해방투쟁을 노래하는 빼어난 시인혹은 해방의 전사(戰士)’ 따위의 수식어를 갖다 붙이지만, 시인은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자신을 고작해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한 줄기 촛불, “돌멩이 하나”, “불씨 하나에 빗댄다.

 

이것은 시인의 나약함의 표현인가? 아니다. 시인이야말로 우리 겨레가 낳은 위대한 전사(戰士) 시인이라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시인이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시인의 시를 읽은 한 젊은이가 시인을 한 번 만나보기 위해서라도 나도 감옥에 들어가고 싶다고 느꼈을 만큼, 시인의 거침없는 해방투쟁의 삶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시인이 스스로를 한없이 낮춘다. 바로 이 점이 시인의 또 다른 위대한 점이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만한 생각을 일삼는 사람들은 한때는 운동에 열심을 내다가도 운동이 잘 풀리지 않으면 제풀에 지쳐 슬그머니 운동을 접기 십상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화려한 운동 경력을 밑천으로 삼아 적당한 시기에 세상과 타협하는 길을 모색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가슴 깊이 운동의 열정을 품고 운동에 말없이 헌신하면서도 자신을 겸허하게 낮출 줄 아는 사람들은 운동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들은 시류(時流)를 타거나 조급해 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서서히 운동으로 담금질해 간다. 그들에게서 돋보이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운동 과업에 대한 한결같은 성실성이다. 그들은 티내지 않고 묵묵히 작은실천에 헌신하는데, 세월 따라 그들의 운동은 질적 변화를 일으켜 작은실천이 어느 순간 실천이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진실로 대중의 존경을 받고 신뢰할 만한 운동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런 부류의 운동가들이다.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가 맨 처음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을 이렇게 보도한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를 보시고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예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이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자 그들은 아버지 세베대와 삯꾼들을 배에 남겨 둔 채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가 1:16-20).

 

우리는 이 보도의 행간을 읽어야 한다. 생업에 종사하던 사람들이 예수를 따라 나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들은 예수의 압도적인 신적인 권위에 사로잡혀 귀신에 홀린 듯이 예수를 따라 나섰을까? 아니다. 그들이 소중한 생업과 가족을 팽개치고 예수와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기까지 그들과 예수 사이에는 오랜 시간의 대화와 갑론을박의 말씨름과 상호 이해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뜸을 들이다가 어느 순간 마침내 그들과 예수는 날 저물어 깜깜한 밤 불씨 하나 되자고 의기 투합했을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가 예수라는 한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인 예수운동을 의미한다면, 예수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예수운동을 매개로 한 동지적 결속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8. 민중

 

지상의 모든

쌀이며 옷이며 집이며

이 모든 것의 실질적인 생산자들이여

 

그대는 충분히 먹고 있는가

그대는 충분히 입고 있는가

그대는 충분히 쉬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결코!

그대는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먹고 있다.

그대는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춥게 입고 있다.

그대는 가장 오래 일하고 가장 짧게 쉬고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형제들이여!

이 부당성은 뒤엎어져야 한다.

 

대지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부여

바다로부터 고기를 길러내는 어부여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는 직공이여

광맥을 찾아 불을 캐내는 광부여

돌을 세워 마을의 수호신을 깎아내는 석공이여

무한한 가능성의 영원한 존재의 힘 민중이여!

 

그대의 삶이 한 시대의 고뇌라면

서러움이라면 노여움이라면

일어나라 더 이상 놀고먹는 자들의

쾌락을 위해 고통의 뿌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빼앗는 자가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이제 누르는 자가 눌림을 당해야 한다.

바위 같은 무게의 천 년 묵은 사슬을 끊어 버려라

싸워서 그대가 잃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쇠사슬 밖에는 승리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민중’, 나의 칼 나의 피136-137.)

 

대지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부”, “바다로부터 고기를 길러내는 어부”,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는 직공”, “광맥을 찾아 불을 캐내는 광부”, “돌을 세워 마을의 수호신을 깎아내는 석공.”

 

이런 민중들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는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꽃피우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힘은 민중의 노동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민중지상의 모든 실질적인 생산자들”, “무한한 가능성의 영원한 존재의 힘으로 찬양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그대” “민중이여.” “그대는 가장 많이 일하고 가장 적게 입고 있다. 그대는 가장 많이 만들고 가장 춥게 입고 있다. 그대는 가장 오래 일하고 가장 짧게 쉬고 있다.” 자신의 노동의 산물로부터 소외된 채로, “놀고먹는 자들의 쾌락을 위해 고통의 뿌리가된 채로, “서러움노여움을 안으로 삭이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부당하다.” 그래서 시인은 싸워서 그대가 잃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쇠사슬 밖에는 승리의 세계가 있을 뿐이라고 민중들이 해방투쟁에 떨쳐 일어설 것을 촉구한다.

 

민중놀고먹는 자들사이의 이 명쾌한 이분법적 대립! 상호 비타협적 적대적 모순! 이것은 민중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불온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지나친 현실 왜곡, 혹은 다채로운 무지갯빛 색깔로 이루어진 현실 세계를 흑백의 단순 이분법으로 재단하는 시인의 터무니없는 객기인가? 아니다. 이것은 현실 세계를 올바로 파악하려고 시인이 긴 세월 몸부림친 끝에 가닿은 냉철한 현실 인식의 표출이다. “민중대 반민중의 첨예한 갈등과 대립 구조를 파악하지 못하는 현실 인식이란 사실 얼마나 천박하고 낭만적인가!

 

청년 예수도 그랬다. 오랜 세월 육체노동자의 길을 걸었기에 인간과 역사를 민중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자연스럽게 터득했을 예수는 낡은 옷에 새 천조각을 대고 깁거나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식의 개량주의적 운동으로는 민중해방 세상이 동틀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예수운동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변혁운동을 지향한다(마가 2:21-22).

 

예수는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누가 12:49)고 선언한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고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에 기초한 거짓 평화의 세상을 가차 없이 고발한다. 이런 예수의 태도에서 불의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뒤엎고자 했던 변혁적(혁명적) 예수운동의 모습을 읽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역사의식의 부재를 입증할 뿐이다.

 

오늘 이 땅에 민중적 현실 인식과 변혁적 역사 전망을 가진 교회와 신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노동하는 민중의 눈으로 성서와 현실을 읽는 혜안을 기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회심의 한 표지일 것이다.

 

 

9. 역사의 길

 

역사의 길은

갑옷과 투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영웅호걸의 길이 아니지요

강바람에 청포자락 날리며 백마 타고 달리는

초인의 길도 아니고요

역사의 길은 대중의 길이지요

수백 수천만 농부의 길이고 노동자의 길이지요

한데 모여 그들이 들판 같은 데서 광장 같은 데서

천둥 같은 소리도 한번 질러보고

발을 굴러 땅을 치며 가는 길이지요

빼앗긴 토지와 밥을 찾아

빼앗긴 피와 땀의 노동을 찾아

어깨동무하고 나서는 길이지요

무심한 하늘에 침도 좀 뱉어주고

궁정의 음탕이며 고관대작들의 부패와 타락에

비분강개도 좀 하고

에이 더럽다 이놈의 세상 되어가는 꼬락서니

이대로 살다가는 어디 한 사람인들 성하게 살아남겠나!

불평불만도 좀 퍼뜨리며 가는 길이지요

장구소리 징소리 울리며 전투의 쇠나팔소리와 함께

 

역사의 길은 또한

무지개 타고 건너는 은하수의 길이 아니지요

단풍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도 아니고요

아니지요 아니지요 역사의 길은

쉬운 길 반반한 길 걸림돌 하나 없는 평탄한 길이 아니지요

파도로 사나운 뱃길 삼천리

바위로 험한 구만리 산길

천 고비 만 고비 피투성이로 넘어야 할 가시밭길 험한 시련의 길이지요

(‘역사의 길全文)

 

역사의 길영웅호걸의 길”, “백마 타고 달리는 초인의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무지개 타고 건너는 은하수의 길”, “단풍나무 숲으로 난 오솔길”, “걸림돌 하나 없는 평탄한 길이 아니다.

 

빼앗긴 토지와 밥을 찾아 빼앗긴 피와 땀의 노동을 찾아 어깨동무하고 나서는그 길은 대중의 길”, “수백 수천만 농부의 길이고 노동자의 길”, “장구소리 징소리 울리며 전투의 쇠나팔소리와 함께” “천 고비 만 고비 피투성이로 넘어야 할 가시밭길 험한 시련의 길이다.

 

예수 역시 그 위에 있다. 예수운동은 인간의 참된 자유와 해방을 인간 밖으로부터 가져오려 했던 역사 초월적인 운동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흔히 예수를 보통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초인(超人)”, 신출귀몰하는 신적(神的) “영웅으로 착각한다. 이것은 복음서가 전하는 역사적 예수(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교리적이고 관념화된 예수상일 뿐이다.

 

예수는 홀로의 예수가 아니라 더불어의 예수다. 예수가 있는 곳에 민중이 있고, 민중이 있는 곳에 예수가 있다. 예수는 민중을 위하고 민중과 함께하고 민중을 통하는 길, “민중의,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길밖에는 모른다. 예수는 민중 위에 군림하는 법이 없다. 예수는 늘 민중과 어깨동무한다. 예수는 민중들의 요구에 질질 끌려다니지 않고 때로 민중들의 이런저런 이기심을 가차 없이 비판하지만, 그러면서도 예수운동은 민중들의 일상적 요구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마태복음 저자는 예수(운동)의 길을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서술한다: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서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지자 사람들은 갖가지 병에 걸려 신음하는 환자들과 마귀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자들과 중풍병자들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그들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러자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온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마태 4:23-25).

 

여러 지역들로부터 온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랐다는 성서의 보도에는 물론 과장이 뒤섞여 있을 테지만 한 가지 명백한 사실이 있다. 가르침과 복음 선포와 치유를 중심으로 한 예수운동은 절망과 고통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새 삶의 희망을 주었고,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 운동에 동참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뭘 가르쳤을까? 예수가 선포한 복음은 과연 무엇일까? 틀림없이 예수는 빼앗긴 토지와 밥을 찾아” “빼앗긴 피와 땀의 노동을 찾아 어깨동무하고 나서는 길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 길은 가시밭길 험한 시련의 길이지만, 이 길을 통해서만 불의한 현실은 변화될 수 있음을 가르쳤을 것이다. 이런 가르침이 오랜 세월 지배계급이 심어 놓은 노예의식과 쳬념적 숙명론에 빠져 살던 민중들에게는 놀랍도록 기쁜 소식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모든 민중들이 예수운동에 공감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일부 민중들은 예수운동에서 삶의 새로운 출구를 발견하고 용기를 내어 그 운동에 동참했을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복음서의 여러 보도들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상의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참으로 두렵게 느낀 것은 예수라는 한 빼어난 종교적 인물이 아니라, 민중 예수가 민중들과 함께 펼치는 집단적인 해방실천으로서의 예수운동이었다. 그들은 예수운동의 역사적 함의(含意)를 올바로 읽었기에 운동의 지도자인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함으로써 운동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수의 처형으로 예수운동은 끝났는가?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예수의 부활로, 아니 예수의 민중들의 첨예화된 정치적 의식화와 더욱 분명한 현실 인식으로 이어졌다. 1970년 청계천의 피복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자결이 이 땅의 수백만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으로 이어졌고, 1980년 빛고을 광주에서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독재권력의 압살이 이 땅의 근본적인 역사적 모순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계기가 되어 변혁운동으로 꽃을 피웠듯이, 예수의 죽음은 오히려 더욱 가열찬 예수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를 길과 진리와 생명”(요한 14:6)이 되시는 그리스도로 고백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 신앙고백에 그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예수운동의 창조적 계승을 통해서만 역사는 올바른 로 나아갈 수 있고, 세상의 권력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힌 소박한 삶의 진리는 회복될 수 있으며, 민중들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갈 수 있다는 하나의 운동적 강령이기도 하다.

 

 

10. 적막강산

 

콕콕

콕콕콕

새 한 마리

꼭두새벽까지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어둠의 한 모서리를 쫀다

콕 콕콕 콕콕콕......

 

이윽고 먼데서

닭울음소리 개울음소리 들리고

불그레 동편 하늘이 열리고

해 하나 불쑥 산너머에서

개선장군처럼 솟아오른다

 

이렇게 오는 것일까 새 세상은

하늘이 열리고 땅이 열리고

새 세상은 정말

새 세상은 정말

어둠을 쪼는 새의 부리에서 밝아오는 것일까

(‘적막강산全文)

 

꼭두새벽까지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어둠의 한 모서리를 쪼는 새 한 마리를 보면서, 시인은 나지막이 읊는다. “새 세상은 정말 어둠을 쪼는 새의 부리에서 밝아오는 것일까.”

 

새 세상으로 가득해야 할 너른 하늘”, 너른 에 비하면, “콕 콕콕 콕콕콕” “어둠을 쪼는 새의 부리는 너무도 미약하다. “어둠의 한 모서리를 쫀다고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어둠이 물러날 수 있을까.

 

하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던가. 시인은 역사적 상상력으로 그 새 한 마리의 미세한 몸짓에서 어둠의 한 모서가 소리 없이 깨져 나가는 것을 느낀다.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는 것은 자연의 위대한 진리이자 역사의 진리이기도 하다. 모래알이 모여 드넓은 백사장을 이루고, 작은 해방실천이 하나 둘 모여 큰 해방실천을 낳는다. 이렇듯 아직은 저 먼데있는 새 세상불쑥 산너머에서 개선장군처럼 솟아오르는 처럼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것이 역사 발전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인의 굳은 믿음이다.      

 

예수 역시 세상의 변혁을 꿈꾸면서도 새 세상이 한순간에 기적처럼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 당시의 유대 사회에는 종말론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새 세상이 금방이라도 도래하리라고 믿었다고 간주하는 것은 역사의 지평 내에서의 민중해방 실천으로서의 예수운동을 신비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꿈과 비전을 민중들의 마음에 아로새기기 위해 겨자씨의 비유를 이야기했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가 4:30-32).

 

세상에서 제일 작은 씨앗의 대명사인 겨자씨하느님 나라.” 이 둘은 얼핏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는 상호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둘을 연관지음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아마도 예수는 역사 발전에 과정을 생략한 비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느님 나라의 도래라고 하는 인간 사회의 총체적인 질적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긴 세월에 걸친 양적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예수 당시에는 오늘날 철학의 기본개념들 중의 하나인 양질 전환의 법칙이라든가 진화라는 과학적인 개념이 아직 인식의 지평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역사 발전에 대한 장기적인 전망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적지 않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겨자씨의 비유의 행간에서 우리는 그런 개념들의 분위기를 느낀다. “겨자씨가 무성하게 자라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듯이, 하느님 나라로 상징되는 새 세상이 실현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에 걸친 꾸준한 역사 발전이 있어야 함을 예수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예수가 제자들곧 예수운동의 핵심 인물들에게 친히 가르쳐 준 주의 기도’(누가 11:2-4)에서도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인간의 작은 실천과 맞닿아 있음을 발견한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려면 일용할 양식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물질적 분배의 정의가 먼저 이룩되어야 하고, 또 인간 자신이 변화되어야 한다. 즉 인간의 안팎이 달라져야 한다. 그래서 예수운동은 사회의 변화와 인간의 변화를 동시에 추구하는 안팎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과연 예수가 그 안팎의 혁명이 한순간에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도 좀처럼 변화되지 않는 12제자들을 보면서 인간의 변화라는 게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의한 세상에 맞서 싸우면서도, 예수는 견고하게 짜여진 세상의 틀을 바꾼다는 게 계란으로 바위를 치듯 어렵기 그지없음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예수의 역사적 실천으로 인간의 역사는 완성되고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 도래했는가? 아니다. 예수의 실천은 참된 민중사랑과 민중해방 실천의 한 빼어난 모범으로 역사 속에 우뚝 섰지만, 예수운동은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이 어둠을 쪼는 새의 심정으로 서로의 힘과 뜻을 모아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하는 현재진행형의 운동이다.

 

 

11.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예배당의 십자가가 아니다

자본가의 천국

무슨무슨 호텔 꼭대기의 스카이라운지도 아니다

총 든 자들이 몽땅 차지하고 있는 그 정상도 아니고

 

지금 이 땅에서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십자가의 첨탑이 드리운 그늘에 덮여

거적때기 위로 삐어져나온 동사자의 발가락이다

돌아라 돌아라 빨리빨리 돌아라

돌아라 돌아라 쉬지 말고 돌아라

정신없이 돌아가는 자본가의 기계에 먹혀

열 개 중에서 다섯 개가 떨어져나간

어느 선반공의 피 묻은 손가락이다

나머지 다섯 손가락으로는

해고장 말고는 받을 것이 없는 노동자의 분노고

 

그렇다 이 땅에서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착취와 교회의 위선에 죽음을 선고하고

압제자의 추적을 받고 있는 어둠의 자식들이다

얼어붙은 하늘을 찢어발기는

고문실의 비명소리고 감옥의 철창이다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솔직히 말하자122-123.)

 

운동을 하다가 감옥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에 관해서 짧게나마 언급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그리고 그들의 어조는 거의 예외가 없이 매우 비판적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이바지하기보다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시인 역시 기독교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한다.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예배당의 십자가가 아니다.” “지금 이 땅에서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 것은 십자가의 첨탑이 드리운 그늘에 덮여 거적때기 위로 삐어져나온 동사자의 발가락이다.”“정신없이 돌아가는 자본가의 기계에 먹혀 열 개 중에서 다섯 개가 떨어져나간 어느 선반공의 피 묻은 손가락이다.” “착취와 교회의 위선에 죽음을 선고하고 압제자의 추적을 받고 있는 어둠의 자식들이다.”“얼어붙은 하늘을 찢어발기는 고문실의 비명소리고 감옥의 철창이다.”

 

시인에게 있어 예배당, “교회는 하루바삐 죽음을 선고받아 마땅한 위선의 자리일 뿐이다.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십자가의 첨탑이 드리운 그늘밑에 동사자의 발가락이 있는 한, “교회가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과 희망을 외면하는 한, 그런 교회하늘나라에멀리 있다.

 

시인의 이런 비판은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는 무신론자의 터무니없고 악의적인 말장난인가? 아니다. 이미 2천 년 전에 청년 예수도 시인과 같은 생각을 했다.

 

예수가 생각하기에 하늘나라에 가장 가까운사람들은 율법이 명하는 대로 종교생활을 착실히 하는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세상의 부자들과 권력자들과 학식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세상에서 멸시받고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세리와 창녀들”, 즉 당시의 종교적 기준으로 볼 때 하느님 나라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밑바닥 민중들이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마태 21:31).

 

예수가 생각하기에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린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의 몫이다. “부요한 사람들”, “지금 배불리 먹고 지내는 사람들”, “지금 웃고 지내는 사람들의 몫이 아니다(누가 6:20-26).

 

예수가 생각하기에 하느님 나라에서 잔치 자리에 앉을 사람을 소유한 사람들, “겨릿소 다섯 쌍을 산 사람들, 결혼해서 소시민적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잔치에 초대를 받아도 이런저런 구실을 대며 그 초대를 거절할 것이다. 그 대신 가난한 사람, 불구자, 소경, 절름발이들이 그 잔치의 주인공들이 될 것이다(누가 14:15-24).

 

예수는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만은 깨끗이 닦아 놓지만 그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 겉으로는 옳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마태 23:13, 25-28)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한다.

 

우리는 마태복음 23장 전체에 걸쳐 있는 예수의 날카로운 종교비판에 귀기울여야 한다. 오늘 우리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인가? 자신이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기독교 신자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바로 우리들이 아닌가? 오늘 무너져내려야 할 성전은 또 무엇인가? 바로 예수를 이야기하면서도 민중의 아픔과 절망을 외면하고 있는 이 땅의 웅장한 건물들”(마가 13:2)의 교회들이 아닌가?

 

진정한 신자라면, 참된 교회라면 민중중심의 시각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예수를 중심에 둔다는 것은 민중을 중심에 둔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교회가 민중을 시야에서 놓치면 우리의 모든 것은 위선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것이 예수의 종교비판의 요지다.

 

마태 공동체는 바로 이 점을 올바로 간파했다. 세상에서 굶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따뜻한 관심과 애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곧 예수를 외면하는 것이다(마태 25:31-46).

 

 

12. 무덤 앞에서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한 십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나는 오지 않았다 상원아

쓰러져 누운 오월 곁으로 네 곁으로

나는 그렇게는 올 수 없었다

승리와 패배의 절정에서 웃을 수 있었던

오 나의 자랑 상원아

나는 오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

나는 네 주검 앞에 올 수가 없었다

그따위 짓은 네가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왔다 상원아 맨주먹 빈손으로

네가 쓰러진 곳 자유의 최전선에서 바로 그곳에서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나는 왔다

 

그러니 다오 나에게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들불을 밝힐 밤의 노동자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 그것을 나에게 다오

(‘무덤 앞에서’)

 

19805월 남도(南道)의 빛고을 광주를 피로 물들인 독재권력에 맞서 자유와 민주를 외쳤던 광주민중항쟁의 한 지도적 인물로서 계엄군의 도청 진압 작전에서 산화한 윤상원. ‘남민전사건으로 십 년을 복역하고 나온 시인은 사랑하는 벗의 묘지를 찾아 사자(死者)와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시인이 오 나의 자랑 상원의 무덤 앞에 서는 것은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혹은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가 아니다. 시인이 맨주먹 빈손으로벗의 무덤 앞에 서는 것은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시인은 벗에게 나지막이 부탁한다.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들불을 밤의 노동자를", 그리고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나에게 다오.”

 

시인의 이러한 자세는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들의 태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달라져야 할지에 관해서 많은 암시를 준다.

 

예수운동은 아직진행 중에 있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기까지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은 아직너무도 멀다.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시기에는 아직이 땅의 민중들의 아픔과 절망이 너무 깊다.

 

그러므로 오 나의 자랑예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다거나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고 예수를 신격화시켜 찬양하는 것으로 예수에 대한 우리의 예의를 다 갖췄다고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오산이다. 예수는 그따위 짓”, 우리들 스스로 예수가 걸었던 그 길의 대열에 서지 않고 다만 예수와 그가 걸었던 길을 신격화하는 걸로 만족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안일한 태도를 보면서 기막힐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 신자라면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가지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겠다는 결의를 다져야 할 것이다. 공손히 두 손 모아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맨주먹 빈손을 불끈 쥐고 압제에 대한 투쟁의 결의를 맹세해야 할 것이다.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다: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하여 이 몸을 아버지께 바치는 것은 이 사람들도 참으로 아버지께 자기 몸을 바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17-19).

 

그렇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으로 만사가 해결되리라는 식의 허황한 생각을 한 적이 결코 없다. 예수는 자신의 역사적 실천을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요한 14:6)로 이해했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은 그들도 자기처럼 민중해방 실천에 몸을 바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이 자신을 신격화된 그리스도로 대상화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는 제자들에게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는 유언을 남겼다. 무슨 뜻인가? 예수를 진실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것, 예수로 예수를 넘어선다는 뜻이 아닌가?

 

오늘 이 땅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신자들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예수의 역사적 발자취를 따르는 신자들은 너무도 적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의 본질이다. 오늘 이 땅에 교회들에 걸려 있는 십자가는 너무도 많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교회들은 너무도 적다. 이것이 오늘의 한국교회가 역사 발전의 걸림돌로 역기능을 하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다.

 

예수!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보면서 나는 오늘의 나의 삶을 참회한다. 하지만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까지는, 예수운동에 합류하여 민중사랑의 삶을 살아가기까지는, 아직도 나는 진정한 예수쟁이는 아니다. 참된 인간은 못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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