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곁의 예수, 그대 안의 예수 - 전통 기독론에 문제 있다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예수의 인간화

"나의 관심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 되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이다.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받들어왔지만 그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적다. 더구나 예수가 뜻한 바를 실천에 옮긴 사람은 더욱 적다. 예수는 자기가 뜻한 것보다 뜻하지 아니한 것으로 더 자주 찬양/숭배 받아 왔다." (앨버트 노울런,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교 신앙의 대상이 되기 전에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 예수.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마리아와 요셉의 아들, 곧 사람의 아들이다. 우리와 똑같은 시대의 아들이다. 겸손하게 신을 구도하는 자이다. 세례를 통해 신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소명을 깨달은 자이다.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자이지만, 끊임없는 배움과 성장의 과정을 통해 서서히 발전·성숙해 가는 자이다. 당시의 종교적 굴레와 정치적 우상을 부셔버리고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 되는 길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자, 역사의 선구자다. 시대를 거부하는 날카로운 반역의 정신 때문에 시대의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살해된 사나이다.

예수는 몇 가지 점에서 돋보인다. 그는 인생의 위기와 유혹과 절망의 순간들을 부단히 통과하면서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한다. 그는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가운데서 시대의 본질을 꿰뚫어보며, 자신의 온몸을 던져 타락하고 부패한 시대에 도전한다. 그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이해하며 자기 안의 모든 인간적 요소들을 활짝 개화시켜 총체적인 인간, 완전한 인간, 신적인 인간으로 변화해간다. 그러면서도 그는 늘 자신을 "인자(人子)", 곧 사람의 아들로 여긴다. 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정점에 도달하면서도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뻐기는 오만함을 거부한다.

이런 예수 이해는 불신앙의 소산인가? 정통교리와 신학의 예수 이해에 적대되는 "이단"인가? 신적인 예수, 본질에 있어 하느님과 동등한 초월적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은 구석을 너무도 많이 갖고 있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 비하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뿌리로부터 뒤흔드는 오만하고 위험하고 불순하고 그릇된 생각인가?

그렇지 않다! 교리와 신학의 색안경을 벗어 던지고 맑은 눈으로 복음서를 한번 읽어 보라.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제하고 들어가는 기독론이 적지 않게 깔려 있는 복음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복음서 곳곳에서 우리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 이전의 역사적 예수, 인간적 예수의 진실하고 소박한 모습을 능히 발견하게 된다. 없는 예수를 억지로 "발명"하고 날조하는 것이 아니라 2천년 전 예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새롭게 "재발견"하는 것, 이것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예수 안에서 인간구원의 진리를 추구하려 애쓰고 예수를 따르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신학자, 목회자, 평신도들-의 참으로 절박한 과제이다.

우리는 역사를 초월할 수 없다. 아무리 왜곡되고 뒤틀려진 역사라 할지라도, 우리는 역사의 강물에 우리 몸을 풍덩 담그고서야 역사의 모순이나 발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2천년 기독교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다. 2천년 기독교 역사, 신학의 역사, 교회사는 온갖 오욕과 영예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 지배권력에 빌붙어온 한없이 부끄러운 역사이면서도 그 역사의 구비마다 자랑스러운 일면 또한 담고 있다.

따라서 "전통의 완전한 폐기"란 어불성설이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자랑스런 전통만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왜곡되고 부끄러운 전통 또한 늘 겸허하게 되돌아보아야 한다. 자랑스런 전통의 끝자락에 서있는 오늘 우리 신앙과 삶의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되, 알게 모르게 우리 안에 깃든 부끄러운 전통에 대한 성실한 자기비판을 통해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한다. 오늘의 한국교회, 그리고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과 삶 속에는 그 두 전통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진술 또한 그렇다. 인간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열렬한 추구 때문에 불의한 시대에 거역하다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게서 인간의 참된 구원자(해방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갖은 핍박과 순교를 당하면서 내뱉은 그 가슴 섬뜩한 고백,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목숨 바쳐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그 무엇"을 담고 있는 그 고백, 역사의 변두리로 내몰렸던 많은 시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절망과 좌절과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죽음보다 강한 생명의 끈질김을 노래했던 그 고백, 2천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전해 내려온 이 핏빛 고백의 의미를 우리는 생의 매순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이 자랑스런 고백의 전통에는 이제는 정녕 폐기처분되어야 할 불순물도 많이 섞여 있다. 교회가 세상에 어엿하게 자리를 잡고 세상 권력자들과 야합하는 과정에서 이 고백의 최초의 의미와는 상반되는 왜곡되고 뒤틀린 요소들이 하나 둘 끼여들게 되었다. 목숨 걸고 해야 했던 이 고백이 교회사의 어느 순간 앵무새처럼 주절거리는 주문으로 변질되면서 이 고백 본래의 생명적·해방적·전복적 성격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대신 반생명적·억압적·체제 유지적 성격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이 고백이 인간 예수를 우리 평범한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신적·초월적 그리스도로 둔갑시킴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마술적인 종교,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인간을 대신해 말끔하게 처리해 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노예적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로 변질시켜 오지나 않았나 하는 점이다. 예수는 인간에게 깃든 신적이며 성스러운 힘을 믿고 이 힘의 발아를 통해 인간이 인간답게 되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기독교는 신앙과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잠재적 힘을 멸시하고 이로써 인간을 예수의 노예로 만들어온 것은 아닌가. 예수가 믿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통해 참된 인간성을 구현했음에 기초하여 시작된 이 고백이 이제 오늘 우리 시대에는 참된 인간화의 길을 가로막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로 전락하고 만 것은 아닌가.

오늘 한국이라는 좁은 땅덩어리에 800만에 육박하는 기독교인들이 존재한다던가? 이들 중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그런데 왜 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가. 왜 우리 사회에는 사랑과 자유와 정의와 평등과 평화와 생명과 통일과 인간적인 친교가 아니라 무관심과 억압과 불의와 불평등과 전쟁과 폭력과 죽음과 분열과 다툼이 판을 치고 있는가. 아니, 왜 한국교회 내부에서도 온갖 추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이기심과 파벌싸움과 권력욕과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는가.

고백이 부족해서? 아니다. 이 땅 이 교회에 고백은 차고 넘친다. 신앙이 부족해서? 아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처럼 뜨겁게 불타는 신앙을 가진 민족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고백의 내용이다. 신앙의 내용이다. 고백과 신앙의 자세이다. 예수에게서 모범적으로 드러났듯이 고백은 행동으로, 신앙은 해방의 몸부림으로 구체화되고 승화되어야 한다. 입술만의 고백, 주체적인 해방의 몸부림이 없는 신앙은 반예수적인 것이요, 따라서 반기독교적인 것이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은 "인간 예수에게서 모든 참되게 인간적인 요소들이 발견된다"는 고백으로, "인간 예수의 삶에서 인간의 선한 자질이 활짝 꽃을 피웠다"는 고백으로 해석될 수 있고 또 해석되어야 마땅하다. 예수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리스도였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태초에 각본이 짜여진 드라마이며, 바로 이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고백하는 데만 인간의 구원이 있다고 "신비하게, 마술적으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예수가 끊임없는 배움과 성장의 과정을 통해 인간의 인간 됨을 멋지게 실현하였듯이 우리도 예수를 닮아 우리 안의 인간적 자질들을 부단히 계발하고 발전시켜 사람다운 사람으로 완성되어져가야 한다는 고백으로 "평범하게, 실천적으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닮아가야 한다? 우리 역시 오늘 이 땅의 예수가 되어야 한다? 그렇다. 예수가 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나를 따르라." 이것이 예수의 뜨거운 목소리였다. 예수는 엄연히 인간이었는데, 우리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었는데,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다정한 벗이었는데, 왜 교회의 지배적인 신학과 교리에서는 너무도 명백한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이단"으로 낙인찍으려 하는가. 신이 되려는 인간의 거만을 우려해서인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런 상투적인 "이단" 시비에는 뭔가 불순한 동기, 예를 들어 신자들을 신격화된 초월적 그리스도 앞에서 주눅들게 하고 자기 비하적·노예적·굴종적·비주체적 인간으로 길들임으로써 교권을 합리화하고 이 교권에 기대어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종교지배자들의 교활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닌가.

2천년 교회사에서 불의한 시대와 타락한 교회, 그리고 신앙의 해방적 생명력을 질식시키는 교리와 신학에 반기를 든 소수의 예언자적 목소리가 "이단"의 이름으로 박해받고 처형당한 일이 그 얼마이던가. 참으로 창피한 노릇이지만,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밀하게 세상권력과 야합한 교권세력이, 인간의 진정한 자유와 신앙의 참된 가치를 외치는 자들을 다름 아닌 "정통" 교리와 신학의 이름으로 이단시하고 처단한 일은 부지기수였다. 말이 교회사지 실은 세속권력에 못지 않은 권력욕과 지배욕과 기득권 유지에 눈먼 교회 권력자들의 온갖 독선과 음모와 계략이 판을 쳐온 역사, 우리 기독교의 역사는 바로 이런 수치와 오욕의 역사였다.

이 부끄러운 역사, 이 역사의 끝자락에 서있는 오늘 나의 삶과 신앙 속에도 깃든 이 왜곡된 역사 전통을 바로 알고 이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 이것이 오늘 이 땅의 종교개혁이요 예수를 진실로 믿는 신자들에게 피할 수 없이 주어진 십자가의 길이 아니겠는가. 사람을 억누르는 종교, 다른 것도 아닌 예수와 신앙의 이름으로 인간성을 짓밟는 교회와 신학, 진리와 생명에 대적하는 숨막히게 틀이 짜인 닳고닳은 교리체계들, 예수가 의도했던 것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으로 예수를 신격화시켜 우리와 예수 사이의 거리를 한없이 멀게 만드는 잘못된 기독론, 이제 이 모든 것들은 역사적 예수, 반역의 정신으로 충만했던 갈릴리 예수의 이름으로 과감히 척결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김지하는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 다름 아닌 예수의 해방을 다루었다. 먼저 예수가 해방되어야 한다! 가시면류관 대신에 금관을 쓰고 있는 예수, 견고하고 갑갑하기 짝이 없는 신학과 교리체계 속에 갇혀 질식당하는 예수, 부자와 권력자들 편이 되어버린 예수, 자신이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역사의 변두리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는 무관하게 되어버린 예수, 자기 본래의 인간다움을 모두 제거 당한 채 초월적 그리스도로 신격화된 예수, 이 변질된 예수를 2천년 전 예수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리지 않는 한 한국 기독교에는 희망이 없다는 그의 날카로운 고발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정녕 예수는 그리스도인가? 그렇다면 먼저 예수를 예수답게 하라. 예수의 인간성을 회복하라. 예수를 인간화하라. 예수에 대한 우상화·신격화 작업을 신속히 중지하라. 하늘 보좌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이 땅 이 세상 한복판의 예수로 복귀시켜라. 모든 것에 초연한 그리스도를 인간의 작은 행복과 불행에 웃고 우는 감성(憾性)의 예수로 회복시켜라.

그리고 인간으로 복권된 예수에게서 인간의 아름답고 선한 모습들을 마음껏 발견하라. 그 아름다운 예수를 중상모략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권력의 그 죄악성과 잔인성을 또한 발견하라. 내 안에 있는 선한 자질들, 해방과 자유와 생명의 잠재력을 발견하라. 또한 내 안에 잠복되어 있는 죄성과 이기심과 권력욕과 지배욕과 진리를 거스르는 교만과 무지를 발견하라. 내 안의 모든 "예수적"인 것에 감격하고 기뻐하라. 내 안의 일체의 "반예수적"인 것에 전율하고 통곡하라.

예수 닮기, 예수 따르기를 열망하라.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씩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라. 고통 당하는 생명에 대한 한결같은 관심과 애정, 생명을 억압하는 일체의 제도와 권력과 법과 종교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타는 분노, "사람의 아들인 내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당당한 자기인식, 생명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피끓는 신념, 하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 언젠가는 이 땅 위에 실현되고 말리라는 현실 변혁적 신앙, 신앙의 길은 십자가로 통하지만 이 십자가의 길은 역사의 선구자들이라면 피할 길이 없는 참 자유와 사랑과 사람됨의 길이기도 하다는 예언자적 신앙, 인간 예수의 이 모든 고귀한 가치들을 하나 둘 나의 것으로 만들어가라.

예수의 인간화! 이것은 신학적인 유희가 아니다. 지적인 놀이가 아니다. 2천년 유구한 기독교 전통에 도전하는 객기가 아니다. 예수가 인간화되지 않으면, 예수가 인간으로 복권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인간화의 길에서 멀어진다. 예수가 진정 우리의 벗이라면, 우리의 구원자라면, 그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진정 우리를 구원(해방)시킬 수 있으려면 그 십자가와 부활에는 참으로 "인간적"인 요소가 깃들어야 하고 우리의 신앙과 삶이 그것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아야 한다.

2. 인간의 예수화: 믿음의 힘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이 사람의 처방은 다름 아닌 믿음, 소망, 사랑이었다.... 예수는 우리가 좀더 깊은 믿음을 통해서 ‘행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예수가 모범적으로 보여준 자세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것이다.... 예수에게는 언제나 근본적인 변화가 중요했다. 그 시대의 병자들은 예수 주위에 몰려와 '자비를 베푸시고 도와주소서'라고 외쳤다. 그러나 예수는 이에 대해 '이것은 전적으로 너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것은 마음의 각성이었다.... 예수는 영혼의 성스러운 힘, 즉 우리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성스러운 힘을 이해했던 것이다." (프란츠 알츠, 『멋진 남자! 예수』)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된다. 전능하게 된다.... 예수에게 믿음이란 하나의 전능한 힘, 불가능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다. 요한이 회개의 세례에 호소했던 거기서 예수는 신앙에 호소했다.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할 수 있는, 불가능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믿음의 힘이다.... 믿음과 반대되는 것은 그러므로 숙명론이다. 숙명론은 대부분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유력한 생활태도다.... 예수는 믿음의 창시자였다." (앨버트 노울런,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예수가 참된 인간성의 한 모범인 한, 우리 모두는 예수를 닮아가야 한다. 예수를 닮아간다는 것은 곧 우리가 인간답게 변화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화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는 것 이외에 달리 인간의 구원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구원에 대한 이런 견해 역시 "정통" 기독교를 내세우는 자들의 엄청난 반발에 직면할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원죄로 얼룩진 인간 내부에는 구원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고 오직 구원은 인간 외부로부터, 즉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신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부터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정통신학과 교리의 입장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예수의 인간화를 말하더니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의 예수화를 말한다고, 이건 끔찍스런 신성모독이요 주제넘은 인간의 신격화라고 그들은 펄쩍 뛸 것이다.

그러나 한번 곰곰이 따져보자. 인간의 예수화, 인간의 내면에 깃든 선한 잠재력의 최대한 개화를 말하는 것이 왜 문제란 말인가. 인간을 자꾸만 어쩔 수 없는 죄인, 벌레만도 못한 죄인으로 내몰아 신격화·우상화된 그리스도 앞에서 한없이 초라하고 주눅들게 만드는 것은 "정통"이고, 예수의 인간화와 함께 인간의 예수화를 강조하면서 인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믿는 것은 "이단"이란 말인가. 예수는 인간 속에 깃든 성스러운 힘을 믿고 이 힘의 발현을 통해 이 땅에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기를 애타게 바랬는데, 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기독교에서는 자꾸만 인간을 깎아 내리려고만 드는가.

오늘의 기독교가 하는 짓거리들을 보면 아마 예수는 기가 막힐 것이다. 예수는 인간을 섬겼는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독교는 인간을 짓누르고 있다. 예수는 인간을 다시금 인간으로 살리고자 목숨 바쳤는데, 바로 이 예수의 이름으로 오늘의 교회는 인간의 자유와 잠재력을 억압하고 있다. 예수는 인간의 죄성과 함께 성스러움 또한 발견하고 이 세상의 인간들이 자기 내면의 이 거룩한 인간적 씨앗들을 잘 가꾸기를 갈망했는데, "정통" 신학과 교리에서는 인간의 죄성만을 강조하면서 인간 내면의 거룩한 씨앗들은 싹둑싹둑 잘라내고 있다. 이 얼마나 무지하고 몹쓸 짓인가.

믿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예수가 보여준 믿음의 본이란 무엇인가? 언제 예수가 "나만 믿으면, 나만 그리스도로 고백하면 졸지에 구원받는다"고 말했던가? 왜 2천년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기독교는 어쩌다가 이렇듯 상식에서 이탈한 "신비적·마술적" 종교로 치닫게 되었는가? 왜 "정통" 기독교에서는 예수와 구원을 끝없이 신비하고 마술적인 것으로 치장하고 왜곡시키려 하는가? 예수의 말과 행동을 통해 드러난 구원은 그리도 단순하고 인간적이었는데, 왜 교회의 신학과 교리는 구원을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것으로 한없이 복잡하게 만드는가?

예수는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 깃든 성스러운 힘을 발견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이 발견, 이 마음의 각성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라고 여겼다. 예수는 인간 외부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 내부의 변화야말로 인간과 사회를 뿌리로부터 새롭게 하는 길임을 믿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지 않는 한 인간은 언제나 환경의 노예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것이 예수의 평범하면서도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된다. 전능하게 된다.... 예수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나의 전능한 힘, 불가능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이다"(앨버트 노울런). 숙명론의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당시 사회에서 이렇듯 인간에게 잠재된 믿음의 힘에 불을 당기려 했던 예수는 과연 믿음의 창시자였다. 예수는 인간을 믿었다.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을 확신했다. 그 무엇인가에 억눌려 있는 이 힘을 해방시키는 것이 곧 인간화의 길이요 인간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는 또한 희망과 사랑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확고부동한 희망,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거침이 없는 사랑, 타인을 위해 말없이 헌신하고 피 흘리는 사랑이다. 예수의 그 희망은 인간의 잠재력을 좀먹는 체념적 노예의식과 숙명론을 겨냥한 예리한 비수요, 예수의 그 사랑은 무관심과 미움과 증오가 판치는 살벌한 세상에 맞서는 비장의 무기였다.

예수는 이런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있는 한 인간과 세상은 구원될 수 있음을 확신했다. 인간의 선성(善性)에 대한 믿음, 인간적인 사회에 대한 희망,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 이 셋을 중심축으로 하여 예수는 당시 사회를 뿌리로부터 뒤흔들 수 있었다.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서도 예수가 당대의 막강한 정치/종교체제를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이렇듯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이 참으로 인간적 가치들인 믿음과 희망과 사랑에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와 예수운동의 인간적인 가치들을 깨닫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가 모범적으로 보여준 자세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가능한 것이다"(프란츠 알트). 예수의 인간화, 이것은 인간의 예수화라는 실천적인 명제로 귀결된다. 예수의 사상과 행동에서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이 인간화의 길이 제시되었다면, 인간다움을 꿈꾸는 모든 인간이 그 길을 따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이치가 아닌가.

"정통" 기독교는 말할 것이다. 인간의 예수화란 말도 되지 않는 억지 주장이라고. 그러나 이 주장이야말로 반예수적인 것, 예수가 의도했던 바에 전적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가 복음서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인간의 모든 문제를 "졸지에" 풀 수 있는 전능자요 해결사요 그리스도라고 내세운 적이 없음을 새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가 '그리스도'였다는 것은 후대의 추종자들이 붙인 것이다. 그를 그 길로 나서게 한 것은 그에게 들려졌던 음성이요 그에게 보여진 비전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품었던 비전이다"(로버트 펑크).

그렇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우리의 고백이 참으로 힘을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앞서 역사적 예수가 품었던 비전을 알아야 한다. 예수가 인간에 대해 품었던 역사적 비전을 무시하고서야 어찌 예수를 인간의 구원자인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교리와 신학이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 오늘 우리가 이어가야 할 예수의 비전을 외면한 채 기독론에 기대어 인간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인간구원을 신비화·신화화·비역사화·마술화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역사적 예수의 역사적·구체적 인간구원의 비전을 왜 "정통" 교리와 신학에서는 자꾸만 추상화하려 드는가.

예수는 하나의 "길"(요한 14:6)이다. 예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인간화(구원)의 길이다. 예수가 자신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 하나의 길이 되었듯이, 우리 역시 "제 십자가"(마태 16:24)를 지고 우리의 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예수가 우리 "대신" 우리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런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서의 치유기적 이야기에서 예수가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마가 5:34)고 거듭 말하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는 하나의 "길"일 뿐이지,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린 문제란 의미가 아니겠는가.

물론 "예수, 그는 비범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도 나에게 영감을 주며 희망과 소명을 준다"(도미닉 크로산). 바로 여기에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함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됨의 길을 완전히 걸어 사람의 길의 한 빼어난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 그 예수의 길을 대하면서 우리는 끊임없이 도전 받고 영감과 소명 또한 받는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에 있어 예수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따름, 나머지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몫으로 남는다.

예수를 보면서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던 우리 내면의 선한 싹과 잠재된 힘을 새삼 발견한다. 예수의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우리는 참된 인간성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이 세상의 고통 당하는 생명 하나에 가슴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예수의 그 맑고 선한 마음씨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무디어진 마음과 메마른 눈물샘을 반성하게 된다.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벗"(요한 15:13-15)들을 사랑했던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이기심과 무관심과 경쟁심의 포로가 되어 친구들의 딱한 사정을 외면하기 일쑤인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뉘우치게 된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을 억압하는 일체의 것에 대해 거침없이 저항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우리는 선뜻 역사의 선구자로 나서지 못하는 우리의 비겁함과 용기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예수처럼 살아가는 데에 우리의 구원이 있다. 생명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고 불의에 맞서는 구원의 길은 "좁은 문"(마태 7:13)이요 고통스런 십자가의 길이지만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히브리 12:2)를 바라보면서 우리도 예수처럼 살 수 있다. 우리는 때로 나약하고 세상의 온갖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예수의 당당한 자세를 본받아 열심히 노력하면 "진리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사람들"(요한 17:17)이 될 잠재력 또한 충분히 갖고 있다.

예수는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요한 15:13).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 무슨 말인가? 예수를 믿음은 예수가 한 일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감을 갖는 것이요, 우리는 예수의 벗이며,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 및 예수와 하나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듯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이야기는 쉽고 간결하다. 인간의 무한한 힘을 신뢰한다. 신비적·마술적이지 않고 구체적·실천적이다. 인간을 죄인으로 내몰아 신격화된 초월적 그리스도 앞에 주눅들게 하지 않고 예수의 다정한 벗이요, 생명사랑 해방실천의 동역자로서의 인간의 막중한 사명을 일깨운다. 예수의 인간화와 함께 인간의 예수화를 강조한다.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고 우리가 진리 안에서 하나 되어야 하고 또 하나 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신나고 두려운 일인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고백하는 어느 한 교파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삶으로써 참으로 인간적인 존재가 된 사람이다"(레오나르도 보프). 오늘 이 땅의 신자들이 이 한 마디 가슴에 새길 수만 있다면, 한국교회와 사회는 인간화의 길, 구원의 길에 한 발자국 성큼 다가설 수 있으리라 믿는다.


3. 그대 곁의 예수, 그대 안의 예수

"만일 오늘의 교회가 고난받는 이웃의 얼굴과 아픔에서 오시는 그리스도의 얼굴과 음성을 동정(同定)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유대교의 실패를 되풀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메시아 신앙과 묵시문학적 상상으로 투사된 우주적 종말론 때문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 전철을 밟고 기독교회는 그 기독론 신학 때문에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는 것일지 모른다." (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나는 완전한 인간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생의 소명이며 우리 모두가 성취해야 할 엄숙한 과제이다."  (네스또 파즈, 『동지를 위하여』)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예수가 진정 우리의 구원자라면, 우리의 벗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예수에게 우리의 구원을 내맡길 수는 없으니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예수를 우리의 다정한 벗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니까.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자들에 따라 각기 다를 것이다. 어떻게 답하든 그것은 각자의 자유이다. 그러나 어떻게 답하느냐에 따라 신자들의 신앙과 삶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를 하느님 우편에 앉아 계신 초월적 그리스도로 생각하는 신자는 아무래도 이 땅 이 세상보다는 내세의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를 이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신자는 하늘보다는 땅, 내세보다는 현세, 뭔가 신비하고 추상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에 관심을 기울이며 살아갈 것이다.

그러면 복음서에서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고 있는가? 먼저 예수 탄생 이야기를 살펴보기로 하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가 베들레헴 마구간 "말구유"(2:7, 12)에서 태어났다고, 그리고 이 성탄의 기쁜 소식을 주님의 천사를 통해 처음으로 접한 자는 "밤을 새워가며 양떼를 지키고 있었던 목자들"(2:8)이라고 보도한다. 마태복음에서는 동방 박사들, 다시 말해 이방인으로서 하늘의 징조들을 연구하던 점성술가들의 입을 빌려 예수 탄생의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말구유"에 대한 언급이 없는 대신 그 소식을 듣고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술렁거렸다"(2:3)고 보도한다. 이것으로 미루어 마태복음은 예수 탄생이 기존질서를 위협하는 뭔가 심상치 않은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애써 전하려는 것 같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예수 탄생 이야기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고 "민중적" 색채가 가장 뚜렷한 마가복음에서는 예수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1:1)의 서두를 연다. 즉 마가복음은 처음부터 기독론을 전제하고 들어가면서도 예수 개인의 출생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예수가 세례(소명)을 받고 펼쳐나가는 일체의 활동을 복음으로 파악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1:1)고 가장 신학적인 색채를 풍기면서 예수의 소위 선재설을 강조한다.

대충 이 정도만 놓고 보아도, 4복음서 모두 예수 탄생의 의미를 자기 나름의 신학적 관점에서 달리 보도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예수 탄생의 의미에 대한 획일적인 정답은 있을 수 없다는 것, 신앙 "고백"의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다분히 역사적·문학적 "상상력"과 결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예수 이해, 자신이 옳다고 받아들이는 신학이나 교리를 남에게 함부로 강요하는 것은 참으로 주제넘은 일이다.

마구간처럼 초라하고 지저분한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마태복음에 마음이 더 이끌릴 것이다. 철야작업을 밥먹듯이 하는 노동자라면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이야기에 보다 친근감과 정겨움을 느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예수 이야기, 신앙의 역사적 실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마가복음에서 보다 역동적인 예수 이해를 발견할 것이다. "정통" 교리나 신학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래도 요한복음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각자의 삶의 처지나 관심사에 따라 이렇듯 다양한 입장이 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물론 우리는 서로의 입장을 존중해야 한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신앙고백과 신학의 "다양성"을 밑바닥에 깔고 있는 복음서의 기본정신에도 위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모든 고백이나 신앙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되어야 하는가? 모든 고백, 모든 신앙, 모든 신학, 모든 교리는 "똑같이" 소중하고 똑같이 옳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신자들이 서로에 대해 인간적인 존경과 개방적인 자세를 갖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은 꼭 필요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가치판단은 피할 수 없다. 인간을 보다 인간답게 하고 생명을 섬기는 데 이바지하는 것과 인간을 억압하고 생명을 짓누르는 것, 이 둘을 신중하고도 정확히 구별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청된다.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나누려는 이분법적 태도는 위험하지만, "상대적으로" 어느 쪽이 보다 인간화와 생명의 개화에 기여하고 있는가를 따져 묻는 것은 모든 신자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신앙과 이성은 적대적인 것이 아니다. 신앙이 하느님의 선물이듯 이성 역시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더없이 소중한 선물이다. 사리를 분별할 줄 아는 이성이 없이는 신앙은 자칫 미신이나 신비로 전락하고 만다. 2천년 교회사가 가르쳐 주는 대로 이성을 등진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으로 빠져들어 엄청난 오류를 범하기 십상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이성을 내리누른 중세 기독교가 무려 1천년에 이르는 암흑시대를 초래했던 것은 그 웅변적인 실례이다. 신앙과 이성은 때로는 서로 견제하고 때로는 다정히 협력하면서 함께 굴러가야 할 두 개의 수레바퀴인 것이다.

성경을 생각해 보라. 성경이 이성에 반하는가? 성경이 이성을 등진 오로지 신비체험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과학이 발달하기 이전에 형성·기록된 성경이기에 오늘 우리의 눈으로 볼 때는 뭔가 "신비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들이 더러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을 이성에 반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기본적인 상식에 속하는 문제이지만, 성경 전체는 어디까지나 구체적인 삶의 상황을 밑바닥에 깔고 이 소용돌이치는 삶 속에서의 구원을 성찰하고 고백하는 "역사적" 문서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불가사의한 책이 결코 아니다. 축자영감설에 사로잡혀 건전한 이성을 외면한 채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다반사인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풍토에서, 신앙과 이성의 창조적 긴장과 협력의 관계를 강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다시금 묻는다.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신학적 "상상력"과 함께 실천적 "이성"을 필요로 하는 물음이다. 뜬구름을 잡는 상상력이 아니라 "역사적" 상상력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실천적 이성·반성·성찰을 요구하는 물음이다. 그때 그때의 순간적인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답할 수 있는 성질의 물음이 아니다.

마태복음은 "최후의 심판"(25:31-46) 이야기에서 충격적인 보도를 한다. 예수를 이 세상에서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된 사람,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옥에 갇힌 사람 가운데서 발견한다. 아니, 그런 사람과 예수를 "동일시"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여기 있는 형제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40, 46절). 그리고 이 이야기에 뒤이어 바로 "예수를 죽일 음모" 이야기가 나온다. 얼마나 시사적인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과 하나가 된 예수, 당시 사회에서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는 이들의 대명사인 "세리와 죄인들"(마태 9:11; 마가 2:16; 누가 5:30)의 친구인 예수, 이 예수를 당시의 종교 엘리트들과 권력자들은 못마땅해 하고 온갖 음모를 꾸며 죽음으로 내몬다. 왜? 그들의 신앙과 신학체계에 있어서는 모름지기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는 보통 사람들과는 비할 바가 없는 뭔가 초월적인 존재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민족주의적 메시아 신앙과 묵시문학적 상상력으로 투사된 우주적 종말론 때문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에게서 메시아를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서남동).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고난받는 이웃의 얼굴과 아픔에서 그리스도를 감지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정통" 교리와 신학에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인 예수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는가? 이 땅의 목회자들 중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를 그리스도로 선포하는 이들이 그 얼마나 되는가? 예수의 참으로 인간적이며 민중적인 모습에서 그리스도를 느끼고 이 예수를 닮아 살려고 애쓰는 교인들은 또 얼마나 되는가?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 역시 "기독론 신학" 때문에 저 "유대교의 실패"를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제 한국교회는 냉철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예수를 교회 안에, 교회의 도그마 안에, 그 숨막히는 교리와 신학체계 안에 꽁꽁 가둔 채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고 있는 오늘의 자기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야 할 것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인간화, 인간의 예수화, 인간성 회복으로서의 구원을 "이단"으로 낙인찍는 무지몽매함을 크게 뉘우쳐야 할 것이다. 이 회심을 거치지 않는 한 한국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사적 소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오늘 예수는 어디에 있는가? 그대 곁에 있다. 그대 안에 있다.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로서 그대 곁에 있다. "완전한 인간화의 경지에까지" 도달하기를 꿈꾸는 그대 안에 있다. 인간답고 싶은 신음과 절규로써 그대 곁에 있다. 그대의 사랑 안에 있다.

신앙에 기대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고유한 운명을 깨닫는 사람, 예수에 기대어 인간화를 자기 생의 소명으로 삼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다.

* 글쓴이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 《함께하는 예배》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트로츠키》 《신비주의 신학》 《냉전과 대학》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등의 번역서가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명시》 《세계의 기독교 명시》 등을 엮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sort
15518 바람예수글 사순절 묵상자료 - 이해인 수녀의 '사순절의 기도' 외 16편의 시와 기도 바람예수 2010-01-11 20207
15517 바람예수글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바람예수 2009-10-29 15526
15516 바람예수글 200그램 죽 속에 있는 하나님 바람예수 2007-11-15 14123
15515 바람예수글 <생일에 관한 시 모음> 구광렬의 '생일날 아침' 외 바람예수 2010-10-19 13382
15514 바람예수글 '역사적' 예수와 예수운동 바람예수 2007-11-05 12257
15513 바람예수글 바카스 한 병의 예수 - 어느 여공의 간증 바람예수 2007-11-16 11530
15512 바람예수글 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4) 바람예수 2008-01-23 11293
15511 바람예수글 <비에 관한 시 모음> 손동연의 동시 '빗방울은 둥글다' 외 바람예수 2010-03-16 10962
15510 바람예수글 시로 풀이하는 이야기 신학 - 천상병의 시에 기대어 바람예수 2007-11-24 10756
15509 바람예수글 시로 풀이하는 예수운동 이야기 - 김남주 시인에 기대어 바람예수 2007-11-13 10496
15508 바람예수글 기독교인과 자연: 과거와 현재 바람예수 2007-11-21 10394
15507 바람예수글 <젊음에 관한 시 모음> 천상병의 '젊음을 다오!' 외 바람예수 2010-12-26 10338
15506 바람예수글 흙 노래 바람예수 2015-09-08 10168
15505 바람예수글 <말에 관한 시 모음> 황인숙 시인의 '말의 힘' 외 바람예수 2010-02-06 10137
15504 바람예수글 선악과를 따먹는 사람들 바람예수 2007-12-02 10081
15503 바람예수글 <전태일 평전>에 기대어 예수 새로 읽기 바람예수 2007-11-05 9938
15502 바람예수글 바람 바람 바람 바람예수 2007-11-20 9840
15501 바람예수글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 누가 18:9-14 바람예수 2008-05-02 9798
15500 바람예수글 그래도 나도 예수쟁인데! 바람예수 2008-05-01 9563
15499 바람예수글 <희망을 노래하는 시 모음> 나태주 시인의 '안개가 짙은들' 외 바람예수 2010-02-04 95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