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바람 바람

바람예수글 조회 수 9736 추천 수 0 2007.11.20 18:49:44
바람 바람 바람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8).

하나, 감정과 이성

복음서를 읽다 보면 곳곳에서 자연현상에 대한 예수의 날카로운 관찰력을 엿보게 됩니다. 쉽사리 스쳐 지나갈 수도 있는 생활 주변의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에서도 하느님의 섭리, 거룩한 영의 임재, 생명의 숨결, 그 여린 숨결을 감지할 줄 알았던 예수는 과연 빼어난 시인이요, 지극히 섬세한 정서의 소유자가 아니셨던가 싶습니다. 그리고 이 섬세한 정서는 질식당한 생명에 대한 슬픔과 분노, 불의한 권력의 무상함, 인간의 이기심과 지배욕으로 말미암아 상처투성이가 된 역사에 대한 냉정한 현실인식에 가 닿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노래한 윤동주 시인 역시 그러합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을 느꼈던 그 섬세한 감정은 곧바로 일제의 식민지배 아래 신음하는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서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투철한 역사의식으로 이어집니다. 시인이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 모습을 보며 "어릴 때 동무들"을 그리는 동심에 젖어들다 이윽고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쉽게 쓰여진 시')를 인식하고, "초 한 대"에서 역사의 제단에 서슴없이 바쳐야 할 "깨끗한 제물(祭物)"로서의 "그의 生命"('초 한 대')을 깨달았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 땅의 탁월한 민중 목사였던 문익환은 또 어떻고요. "하늘처럼 맑은 우리는 호수랍니다"라고 읊는 그 맑고도 드넓은 마음이 목사님의 마음 한가운데 지칠 줄 모르고 샘솟는 옹달샘으로 자리잡았기에 목사님은 이 땅 역사의 모순과 희망을 넉넉히 관망하며 가난과 소외로 신음하는 이들과 한 몸 한 마음이 되어 영원한 청춘의 불덩어리로 민주화와 노동해방과 통일의 긴 여정을 거침없이 달려갈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이런 몇몇 예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군요. 감정과 이성, 고요한 자아성찰과 불타는 역사의식, 맑음과 깊음, 어진 마음과 목숨 바치는 결단, 생활 주변의 미세한 현상들에 대한 맑고 섬세한 감정과 역사 전체를 아우르는 폭넓고도 날카로운 현실인식, 이 둘이 긴밀히 상호 연관된다는 것이지요.

이른바 '통혁당' 사건으로 무려 20년 20일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감옥에 갇혀 아름다운 청춘을 분단된 조국의 희생양으로 바친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감정과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성에 의하여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는, 이를테면 이성이라는 포승으로 감정을 묶어버리려는 시도를 종종 목격합니다. 이것은 대립물로서의 이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잘못 파악함으로써 야기된 모순입니다. 감정과 이성은 수레의 두 바퀴입니다. 크기가 같아야 하는 두 개의 바퀴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햇빛출판사, 153쪽)


둘, 성령은 생명의 바람

오늘의 성서 본문에서는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람의 속성이 어떠합니까?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다가도 광풍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합니다. 겉으로는 잔잔해도 실은 그 안에 무서운 힘을 담고 있습니다. 힘? 맞습니다. 바람은 힘의 흐름이요 에너지의 물결입니다. 또 성령이 바람이요 생명의 영인 한, 성령은 곧 생명의 바람이며, 생명의 힘이며, 살림의 에너지입니다.

죽임의 도도한 힘 앞에서 일견 죽어지내는 듯 하다가도 한번 몰아치면 걷잡을 수 없는 생명의 태풍입니다. 또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붑니다. 절대자유인 셈입니다. 그 어떤 인위적인 힘으로도 바람의 흐름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타율이 아닌 자율이요, 지배와 독재를 거부하는 민주요, 역사의 구석진 곳과 역사의 중심 모두에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자유요, 일년 사시사철 멈춤이 없는 생명의 몸부림이요, 역사의 겨울에서 신음하는 것들에게 생명의 따스함과 환희를 날라다 주는 하느님의 자애로운 숨결이요, 사방으로 생명의 작은 씨앗들을 퍼뜨려 역사의 드넓은 대지에 싱싱한 생명을 무성케 하는 생명의 전도사요, 뜬구름을 좇아 권력과 탐욕에 눈먼 자들의 그 허황한 뜬구름을 일거에 흩뜨리는 정의의 사자입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예수께서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으로 비유하신 이면에는 적어도 이런 정도의 메시지가 깔려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니, 성령 충만하여 나사렛 회당에서 "주님의 은총의 해"의 무조건적이고 즉각적인 실현을 선포함으로써 평온하던 회당에 자유와 해방과 평등의 회오리바람이 휘몰아치게 하신 예수(누가4,18~30), 성령에 힘입어 악령에 대적한 예수, 온갖 비방과 박해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내 길을 가야 한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신 예수(누가13,31~33), 이 예수야말로 성령의 바람 그 자체였다고 보아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셋: 성령 받으면?

그렇습니다. 성령 받으면, 예수의 생명사랑 민중사랑의 넋을 이어받으면, 그런 사람은 자유의 경지에 다다를 것입니다. 생명살림의 힘이 될 것입니다. 역사의 악령들을 물리치는 정의와 해방의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일체의 타율과 강제와 속박을 넘어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불면서 사랑할 것 목숨 바쳐 사랑하고 미워할 것 또한 목숨 바쳐 미워할 것입니다. 고통 없는 행복보다는 고통이 따르더라도 생명을 생명답게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투철한 생명의식에 가닿을 것입니다. 동심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소시민 근성과 은밀한 이기심과 명예욕에서 벗어나 생명의 미세한 숨결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어질고 맑고 푸른 마음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깊고 큰 가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억눌려 통곡하는 생명 하나에서 하느님의 슬픔을,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감지하는 예민한 감정과 날카로운 이성으로 충만케 될 것입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이란 것도 본질적으로는 역사 속의 작고 작은 것들이 하나 둘 모아져 이루어진다는 소박한 진리에 불현듯 눈을 뜨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에서는 나와 너가 따로 없다는 생명의 원초적 통일성을 느끼며 전율할 것입니다. 성령 받은 민중은 자신의 짓눌린 생명을 더 이상은 참지 못해 자유와 해방의 일꾼으로 우뚝 서게 될 것입니다.

권력과 물질을 독점한 소수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이전의 삶을 억울해하며 이제는 역사와 하늘을 우러러 단 하루를 살더라도 사람답게 살겠다고 서로의 손을 뜨겁게 맞잡을 것입니다. 그동안 역사의 변두리에서 잊혀져왔던 자신들이 사실은 역사의 어엿한 주체요 동력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감격과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노동의 때가 덕지덕지 묻어나는 자신의 손이야말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굴려온 창조의 손이요 거룩한 손임을 만천하에 외칠 것입니다. 역사는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끊임없는 창조라는 것을, 진정 아름다운 것은 꽃만이 아니라 생명답게 피어나는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라는 것을 믿고 생명사랑에 자신의 모든 재능과 힘을 바치려 할 것입니다.

성령 받은 여성은 성차별과 가부장제의 기막힌 현실에 온몸으로 통곡하고, 이윽고 이 통곡을 여성해방 운동으로 승화시킬 것입니다. 여성은 남성의 갈빗대에서 나온 남성의 종속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똑같이 평등한 존재라는 것을, 임신이나 출산은 여성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형벌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창조하는 성스러운 노동이요 축복이라는 것을, 가부장제라는 것도 실은 유구한 인류역사 전개과정 속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늘 남성보다 앞서 왔던 생명과 평화와 자유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깊은 의식이 몇 배나 더 자라날 것입니다. 여성에 대한 지배 속에서 참된 인간성을 망각해 왔던 남성의 우매함을 비판하고, 용서하고, 그래서 인간해방 생명해방의 광활한 대지를 향해 우리 함께 달려나가자고 힘차게 손을 내밀 것입니다.

성령 받은 교회는 또 어떨까요. 생명의 증인, 살림의 대변인이 될 것입니다. 예배당의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하지 않고 생명의 친구, 이 땅에서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될 것입니다. 십자가 첨탑의 높이와 헌금 액수와 교인 숫자를 뽐내지 않고 예수의 참된 제자로서 자유와 평등과 해방과 통일과 생명의 친교와 나눔을 이루는 일에서 신앙생활의 보람을 찾으려 할 것입니다. 부자 교회라고 뽐내지 않고, 중산층 교회라고 부자 교회를 부러워하지 않고, 가난한 교회라고 기죽지 않고, 다만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믿음을 가슴 깊이 통곡할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 세속과 거룩, 해방과 구원, 기도와 행동, 예배와 정치, 뜨거운 신앙의 열정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 비둘기 마냥 온순한 마음과 뱀같이 날카로운 지혜, 이 둘을 분리하려 들지 않을 것입니다.

상상의 날개를 대충 이 정도만 펼쳐보아도, 성령 받는다는 것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넉넉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기운(영, 숨)을 받으면 오랜 세월 무덤에 갇혀 있었던 마른 뼈들이 싱싱한 생명으로 소생하리라는 에스겔 예언자의 환상(에스37,1~14)은 결코 헛된 꿈이 아닙니다. 성령만 받는다면, 성령만 받을 수 있다면, 역사는 천지개벽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개인적 수준에서든 사회적 차원에서든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아! 나에게 성령이 임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가슴 한 모퉁이 활짝 열어 생명의 기운이 깃들 수만 있다면, 그래서 생명의 바람이 사방 팔방으로 뻗어날 수만 있다면 … 그래서 윤동주 시인에게서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느끼고 더불어 가슴 아파하는 생명의 연대감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 생명사랑을 가로막는 일체의 것에 대해 분노하고 비판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도피하지 않고 세상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살고 말하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는 자유를 누릴 수만 있다면. …


넷, 성령과 동심(童心)

배운 것 없는 청계천 피복 노동자 전태일이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 한 몸을 노동해방의 제단에 바치겠다"는 결의를 새롭게 하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을 때, 그 외로운 결단의 순간에 성령께서는 그와 함께 계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 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전태일의 1970년 8월 19일 일기)

이렇듯 어진 마음과 매서운 각오로 결국 전태일은 세계 노동운동 역사상 유례가 없는 분신자결을 통해 이 땅의 가난하고 소외되고 잊혀진 사람들을 대변하는 청계천 노동자들의 살인적인 작업환경과 비참한 생활을 세상을 알리는 기폭제가 되었고, 더 나아가 노동해방의 거룩한 씨앗이 되었습니다. 무고하게 시들어 가는 생명체들을 위한 "한 방울 이슬", 인권의 사각지대인 청계천 피복노동 현장에 자유와 해방과 평등의 불씨를 나르는 바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태일의 그 티 없이 맑은 마음과 하느님의 "긍휼과 자비"가 협력하여 이룬 기가 막히고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숙명처럼 따라다니는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도 삶의 여유를 잃지 않고 주변의 동료 노동자들, 특히 나이 어린 시다들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았던 재단사 전태일의 순수한 동심에 생명의 바람인 성령께서 가닿음으로써 이루어진 눈물겨운 생명의 연대작업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마태5,3), 시들어 가는 생명을 견딜 수 없이 "슬퍼하는 사람"(마태5,4), "마음이 깨끗한 사람"(마태5,8), 의식주에 대한 걱정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마태6,33) 구했던 사람, 전태일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여린 듯 강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비록 배운 것은 없지만 가난과 노동의 체험을 통해 현실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역사인식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그 어느 철학자도 깨우치지 못했던 '사랑의 철학'을 온몸으로 거침없이 펼쳐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은 정말이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깨우쳐 줍니다. 우리가 그의 맑은 동심의 1/10만 닮을 수 있다면, 그의 진지하고 성실한 생명사랑의 자세를 1/10만 우리의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몸으로 써 내려간 그의 사랑의 철학의 1/10만 우리 마음에 깃들 수 있다면, 그의 뜨겁고 깊은 민중사랑의 1/10만 한국 교회가 실천할 수 있다면, 방향감각을 상실한 이 땅 역사의 수레바퀴는 천군 천마를 만난 듯 생명이 생명답게 꽃피는 세상을 향해 질주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생애는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동심과 성령, 어진 마음과 뜨거운 생명사랑,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것을 촉구합니다. 성령은 우주 전체에 뻗쳐 있는 하느님의 숨결이요 생명의 기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성령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마태5,3~10)이야말로 생명과 자유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성령 받는다는 것은 생명의 친구가 된다는 것, 생명의 생명다움을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아낌없이 바칠 수 있는 매서운 결단과 자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는 복음서의 핵심을 다시금 상기시켜 줍니다.


다섯, 오늘 나의 삶은 어디에?

예수는 변함이 없는 생명사랑의 실천으로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길과 진리와 생명"(요한14,6)이 되었습니다. 전태일은 티 없는 동심과 온 몸 온 마음을 내던진 민중사랑의 실천으로 이 땅 노동해방 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고 생명사랑, 진실한 인간성의 "완전에 가까운" 모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밖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이들의 모범을 닮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요한1,12)이라는 예수의 말씀이 지금 이 시각에도 이 땅의 역사 어느 한 모퉁이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우리의 삶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이게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인가 아닌가, 신앙이 보수적인가 진보적인가, 교회생활의 연륜이 오래 되었는가 아닌가, 목사인가 평신도인가 하는 문제 이전에 내 마음이 맑고 깨끗한가 혹은 이기심의 때가 잔뜩 끼어 있는가, 성령께서 나와 우리 공동체에 임하셨는가 임하지 못했는가, 진짜 성령을 받았는가 가짜 성령을 받았는가, 생명의 기운이 내 몸과 마음에 뻗치고 있는가 시들어 버렸는가, 섬세한 감정과 날카로운 이성이 조화를 이루는가 불균형한가, 이 땅의 "가장 보잘것없는"(마태25,40) 생명 하나의 아픔에 가슴 미어지는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수십 배 수백 배 더 중요합니다.

만일 이 질문 앞에 "그렇다"고 답할 수 있다면, 성령께서 이끄는 대로 생명의 바람으로 불며 한 세상 살아가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삶과 공부와 신학과 목회와 생활 전체를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의 완고한 마음과 거짓된 신앙생활이 돌이킬 수 없는 구제불능의 상태로 접어들기 전에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서, 예수와 전태일, 문익환과 윤동주가 지녔던 맑고 착한 마음씨를 애써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는 성령에 신들려 짧은 생애를 생명의 바람으로 살았습니다. 문익환 목사, 그리고 전태일은 생명사랑의 믿음에 붙들려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역사의 발전을 낙관하며 후대의 많은 이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하나의 길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들의 그 순수한 믿음과 생명사랑의 실천에 의해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도전을 받는다는 것, 바로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은혜요 축복일 것입니다.

예수 이후, 문익환 이후, 전태일 이후를 살고 있는 나,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와 교회와 민족은 매순간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고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과연 생명의 영으로 충만한가? 혹시 나 때문에 생명이, 생명의 바람이 질식당하고 갑갑해 하지는 않는가? 나의 마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숨결을, 그 여린 듯 강한 생명의 기운을 모셔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깨끗하고 겸손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땅 구석구석에서 소리 없이 불고 있을 생명의 바람,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난하고 소외된 역사의 밑바닥으로부터 불어오고 있을 생명의 바람에 내 생의 전체 무게를 실어버릴 용기와 믿음이 있는가.

"맑은 가을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깊었으며, 그늘과 그늘로 옮겨다니면서 자라온 나는 한없는 행복감과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서로간의 기쁨과 사랑을 마음껏 음미할 때 내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이며 내가 살아 있는 인간임을 어렴풋이나마 진심으로 조물주에게 감사했습니다."
(전태일이 고등공민학교 대항 체육대회를 마치고 쓴 일기)

* 글쓴이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 《함께하는 예배》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트로츠키》 《신비주의 신학》 《냉전과 대학》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등의 번역서가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명시》 《세계의 기독교 명시》 등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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