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자연: 과거와 현재

바람예수글 조회 수 10333 추천 수 0 2007.11.21 14:42:36
<생태학적 신학>            

             기독교인과 자연: 과거와 현재      
                                  
                                  샐리 맥페이그
                                   정연복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우리 시대에 자연과 친화력을 갖는 훌륭한 기독교인이 되는 길을 탐구함에 있어서 기독교인과 자연간의 세 가지 형태의 관계, 즉 중세기의 관계, 계몽주의 시대의 관계, 그리고 생태학적 관계가 특히 적합하다. 각기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등장했지만, 이 관계들은  자연-인간 관계의 다양한 기본 형태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즉 중세의 모델은 기독교인과 자연간의 주체-주체들(subject-subjects) 관계를 성공적으로 입증해 주고, 계몽주의 시대의 관계는 중세 관점의 퇴보와 이 상실의 결과들을 보여주며, 생태학적 관계는 중세와는 의미심장하게 다른 주체-주체들 관계의 갱신을 시사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먼저 우리는 지난 수백 년에 걸친 인간과 자연간의 관계, 즉 계몽주의 시대에 시작된 역사상 새로운 관계에 대해 전반적인 고찰을 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 시대에 적합한 실용적(functional) 우주론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줄 중세기의 현실상에 대한 사례 연구로 옮겨가기에 앞서, 중세의 세계관과 생태학적 세계관을 비교/대조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자연계와의 깊고 일상적인 관계들을 상실하게 된 많은 방법들을 살피면서 우리의 이 과업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고찰할 것이다. 이상 세 모델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모든 유형론은 부분적(제한적)이라는 걸 늘 인식해야 한다.

1. 자연은 우리와 같은가?

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자연을 또 하나의 주체라기보다는 객체로 파악해온 것은 오직 지난 수백 년 동안일 따름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유용성과는 무관하게 자기 나름의 존재와 목적을 가진 하나의 주체였다. 자연은 단지 인간의 이익을 위한 자연자원에 불과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 17세기 과학혁명과 함께 서구적 인식에 근본적인 전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전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객체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다국적기업이 노동자를 “인간자원”이라고 부르면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인간자원을 찾아 나서는 일이 이런 객체화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된다. “자연자원”과 “인간자원”이라는 일상적인 표현들에서 우리 시대를 특징짓는 모든 것을 “객체화하는” 태도가 여실히 드러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이익”이다. 기업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나무나 소나 밀이나 광물처럼 생산 증대의 수단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제가 사람들을 단순한 객체가 아닌 주체들로 간주한다면, 그것은 쟁점이 될 것이다. 사실 노동자를 주체들로서 바라보는 것은 혁명적인 전환이 될 것이다. 자연(즉, “자연자원”)을 주체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 말고는 이 혁명을 능가할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혁명을 거의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혁명이 일어난다면? 경제주의와 소비사회가 하룻밤 새 무너질 것이다. 전혀 다른 일련의 가치들이 등장할 것이다. 소비할 물건의 양이 아니라 삶의 질이 주된 관심이 될 것이다. “모든” 주체들을 위한 행복과 건강과 복지가 훌륭한 삶의 기준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는 지금까지 존재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도래할 미래(모든 타자, 즉 모든 사람과 자연이 객체들로서보다는 주체들로서 인식되는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이 날로 잔인해지는 자본주의라는 오늘 우리의 상황에 대한 하나의 예언자적 비판으로서 쓸모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하는 은유들과 모델들은 몹시 중요하다. 인간과 자연을 자원으로 간주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그런 식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식물과 나무와 대양 등 모든 것을 주체들로서 간주한다면, 우리는 인간이든 인간이 아니든 모든 타자의 고유한 존재와 독특성을 존경하는 방식으로 그들을 다룰 가능성이 높아진다. 과연 어느 모델이 모두의 생명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까? 세계를 바라보는 이 두 방식 모두 그저 관점의 문제일 따름이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객체들로 환원시키는 것이 하나의 모델이듯이, 모든 것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사고방식 역시 하나의 모델에 불과하다. 그런데 한 모델이 원시적이고 감상적이며 낭만적이라고 거절당하는데 반해 다른 모델은 사실적이고 실리적이며 객관적인 것으로 칭송을 받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인가? 사람과 자연을 객관화하는 것이 경제적 관점에서 편리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물과 무생물, 물질과 정신, 인간과 다른 생물들 사이에 아무런 확실한 경계선도 긋지 않는 현대 포스트모던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것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모델은 그 대안만큼은 아니더라도 중대한 의미를 띤다. 이 모델은 우리 시대의 현실 인식과 보조를 맞춘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과 자연계가 본질적으로 서로 연관되고 상호 의존적이라면, 만일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자연에 근원을 두고 있다면, 만일 식물과 바다의 미생물이 없이는 우리가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면, “우리는 자연과 닮고” “자연은 우리와 닮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친근성을 우리 자신을 객체화시킴으로써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자연을 주체화시킴으로써 확인할 것인가?

대부분의 문화들은 단지 그것이 상식적인 선택이라는 이유만으로 후자를 택했다. 인간은 자연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대다수 사람들의 머리에서는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격언으로 유명한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가 인간 존재를 정신 속에 위치시켰을 때 바로 그런 생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서 우리 문화는 기형적이다. 자연 속의 우리의 근원을 껴안기를 거절하고, 우리 시대의 모델들의 관점에서 우리와 자연간의 연관을 애써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절하고, 이런 이해에 입각하여 행동하기를 거절함으로써 결국 우리는 참으로 이상한 존재들이 되고 만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스스로를 우리 자신의 행성에서 이방인, 여행객, 혹은 낯선 타인들로 여기는 것과 같다. 우리의 지배적인 삶의 철학과 “경제주의”라는 종교는 여기 이 지구 행성에서 우리가 영구주민으로서, 이 곳을 가정으로 포옹하는 피조물로서 어떻게 적응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서구, 특히 기독교 문화는 어떠했던가? 중세 문화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사례 연구를 제공한다. 중세 문화에서는 인간 생명이 야생화와 분주한 벌들로부터 천체들과 모든 생명의 근원인 하느님에 이르기까지 모든 다양한 형태의 생명과 복잡하고 깊이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땅과 하늘의 모든 것이 그 무엇인가의 표징이었다. 가장 비천한 잡초에서 가장 아득한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의미로 충만했다. 모든 것이 하느님께 이르는 길, 혹은 선한 생활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었다. 현대 정신에서는 이것을 미신으로, 점성술과 연금술의 기초로, 과학 이전의 순진함으로 여겨 배척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을 “하나의 세계 안에”, “자연 속에”, 하느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역사와 자연의 영역 안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이로써 일상적인 실천을 위한 지침들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배적인 철학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중세상에 대한 보다 상세한 사례 연구의 기초를 놓기 위하여, 이제 중세적 세계관과 생태학적 세계관을 비교해 보자.

2. 중세적 관계 대 생태학적 관계

중세상은 하나의 신성한 세계 질서였다. 복잡한 상호 연관의 그물망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응집된 전체로 결합되어 있었다. “만물”이 한데 결합되어 있었다. 인간은 하느님이 지으시고 통제하시는 질서정연한 우주 속에 살았다. 이 우주 속에서 각 피조물은 제 나름의 지위를 가졌다. 비록 그 지위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라 해도 생명이 있거나 없는 각기 존재는 표징들, 상징들, 은유들, 신화들, 유비들을 통해 타자들과 연결되었다. 그 어떤 것도 단지 그 자체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그 자신을 넘어서 있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존재들-신이든 다른 피조물이든-을 의미했다.      

중세기의 세계상은 점차 가치가 덜한 수직의 쇠창살 위에 건축되어 있었다: 하느님이 꼭대기(하늘)에 계시고, 하늘과 땅 사이의 영역에 거주하는 천사들이 그 뒤를 따르고, 땅에서는 인간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남자가 먼저이고 여자는 그 다음이며, 동물과 식물은 인간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피조물은 자신의 위치, 즉 삶의 모든 측면에까지 확대되는 질서를 지켜야만 했다. 교회에서는 교황과 성직자가 평신도 위에 군림하며 교회는 세속 영역 위에 군림했다. 정부에서는 왕과 군주들이 평민들 위에 군림하고 가정에서는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식들 위에 군림했다.

위계질서적이고 가부장제적이며 이원론적인 세계상에 대한 이런 개략적인 스케치 때문에 중세 생활에서 통용되던 신과 인간과 자연 사이의 많은 미묘한 형태의 관계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이런 관계들이다. 왜냐하면 중세 세계에 풍요로운 성격을 부여함으로써 그 세계를 그리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이 관계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관심의 초점, 즉 중세가 어떻게 주체-주체들 사고의 한 사례 연구가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많은 결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중세 세계에서는 만물이 “한데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그 안의 주민들에게 하나의 가정, 질서 잡히고 포괄적인 현실을 제공했다. 이 시대의 목판화와 그림들이 암시하듯이 그것은 “가정과 같은” 우주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적은 것으로부터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그 안의 모든 부분들이 결합되어 있었다. 17세기까지는 이랬다. 이 세계관이 붕괴되었을 때 느낀 고뇌는 심원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은 단지 과학적인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참으로 개인적이며 종교적인 문제이기도 했다.

그런데 통일성에 대한 중세의 이해에서는 개별성이 확보되지 못했다. 그것은 상징적 존재론에 기초하고 있었다. 만물이 존재의 근거에 참여하며, 따라서 존재론적 유사성 때문에 서로를 상징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런 세계관에서는 만물이 하나의 질서정연한 전체 속에 위치하는 반면에 보다 큰 것이 보다 작은 것을 포괄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세계의 존재들, 가령 식물이나 동물은 신적 임재의 상징 혹은 인간의 이익을 위해 창조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생태학적 상호의존은 상징적 존재론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관계에 대한 은유적 이해에 보다 가깝다. 여기에서는 각기 존재가 서로 유사하면서도 유사하지 않다. 유사하지 “않다”는 데에, 또 서로 그리도 별개인 듯 보이는 것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결되는 방식들에 대한 놀라움과 기쁨에 강조점이 놓인다. 상징이 통일성을 강조하는 데 반해 은유는 차이점을 강조한다. 내 자신을 포함한 오늘날 우리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생태학적 인식의 충격”이란, 아득히 먼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내가 사슴이나 떡갈나무나 별들과 관계 맺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모든 결코 근절할 수 없는 차이점들에 있어서 내 자신은 그밖의 모든 것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 오는 놀라움이다. 모든 것이 “존재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 참여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과 관계된다고 보는 참여적이며 위계질서적인 존재론에 기초한 중세적 감수성에서는 만물 사이의 직접적이며 강력한 연관이 감지되며, 이로써 질서의 모든 부분들 사이의 조화와 균형에 대한 감각이 조장되었다. 여기 반해 포스트모던적 감수성에서는 모든 존재론에 대해 주의 깊은 태도를 취하며 존재들간의 소외와 분열과 차이점을 인식한다.

우리의 신성한 세계 질서가 중세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중세의 성례전적 질서에 깃든 존재들간의 연속성과 통일성, 낙관주의와 조화, 많은 것의 하나에의 종속, 존재와 권력에 대한 단계적인 등급 매기기에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톨릭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보다 “개신교적”이어야 한다. 여기에서 “개신교적”이란 존재들간의 차이점과 난점들을 바라보는 분리적이고 분열적이고 회의적인 포스트모던적 정신 자세를 상징한다. 동일한 사람이나 문화 속에 이 둘 모두가 존재할 수도 있고, 나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의 논제는 가톨릭적 감수성이 더욱 바람직하다는 것, 하나의 신성한 세계 질서에 대한 끈질긴 주장은 옳고도 필요하다는 것,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많은 나쁜 일들과 엄청난 차이들 앞에서 고개를 가로젓는 냉철한 개신교적 시선을 또한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은 우리와 닮았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자연은 하나의 주체라는 점에서 우리와 닮았다. 실제로 자연계에는 수십 억의 주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무수히 특정한 방법으로 자연은 우리와 다르다. 자연을 의인화하려는 소위 원시적 충동은 올바른 것이다. 자연은  고유한 형태의 주체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충동으로 인해 주체들 사이의 실제적인 차이들을 시야에서 놓쳐서는 안 된다.

3. 중세상(像)

주체-주체들 모델을 보여주는 이 중세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먼저 우리는 중세상의 이원론적이고 위계질서적이며 결정론적인 성격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중세상의 중심에 위치한 위대한 존재의 사슬-하느님이 운명의 초월적 결정권자로서 맨 꼭대기에 위치하고 그 밑으로 천사들, 남성들, 여성들, 아이들, 동물들, 식물들, 물질이 차례대로 배치됨-은 생태학적 및 페미니즘적 관점과는 정반대이다. 중세적 해결책을 우리 것으로 삼을 수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중세상에서 배워야 할 점은, 그것이 자기 시대에 하나의 실용적 우주론을 애써 만들어내었듯이 우리 역시 “우리 시대”를 위해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중세문화는 외향적이었다. 사람들은 신적인 것을 발견하기 위해 자기 내부로 향하기보다는 외부자연에 눈길을 돌렸다. 중세인들은 자기 외부에서 풍요롭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한 하나의 세계를 보았는데, 이 세계의 모든 단편들은 하느님에 대한 의미심장한 상징 혹은 은유였다.  

그런 세계에 사는 것, 우리를 계몽하기 위해 하느님이 임명하신 하나의 주체로서의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 “기계처럼 분해되지 않고, 한 권의 책처럼 읽혀져야만 하는” 살아 있는 창조를 오늘 우리는 거의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주체-주체들 모델에서는 특정하고 개별적 피조물로서의 자연과 전체로서의 자연 모두가 본질적 가치를 갖고 있지 않음이 확실하다. 피조물들은 그 자신의 권리를 가진 주체들이 아니다. 중세인들은 자연을 더 잘 돌보기 위해서 자연에 주의를 기울이지도 않았고 자연과 굳게 결합되는 낭만적 갈망도 갖지 않았다. 이와 정반대로, 그들에게 있어서 자연은 한 권의 책이었다. 인간은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발견하기 위해 이 책을 바르게 읽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러나 자연계는 확실히 하나의 객체도 아니었다. 자연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고 파괴할 수 있는 일용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중세인들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 “함께” 살아야만 했다. 이것은 밀접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관계였다.

그러나 이것이 평민들 사이에서는 얼마나 분명했을까? 평범한 예와 비범한 예가 이 점을 밝혀줄 것이다. 평범한 예는 상징주의, 즉 동물과 꽃을 인간 계몽을 위한 은유로 파악하는 널리 받아들여지는 관행이다. 동물들이 인간의 덕과 악덕을 드러내는 그림(Grimm)의 동화는 오늘날 이런 관행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는 한 예이다: 협동적인 집단 거주지를 갖고 있는 개미와 벌들은 우리에게 훌륭한 통치 기술을 가르쳐준다. 여우는 교활함을, 염소는 색욕을, 사자는 용기를 상징한다. 말파리가 존재하는 것은 그것들을 피할 수 있도록 우리의 지혜를 발전시키기 위함이고, 노래하는 새들은 우리의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다. 파리는 생명의 덧없음을 상기시켜 주고, 개똥벌레는 성령의 빛을 의미한다. 두더지는 맹목적인 교황주의자를, 애벌레는 부활을 상징한다. 모든 피조물은 “우리 인간을 위해” 존재했고, 중세의 평범한 남녀들은 문자적 및 상징적으로 이 피조물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살았다.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야생화들에 대한 가장 다채로운 이름들 중 많은 것이 중세에서 유래한다. 식물의 일반적인 명칭들이 시사하는 것은, 인간과 동떨어진 혹은 “객관적” 형태의 의학적이거나 신적인 지식이 아니라 상스러운 유머의 주체들이 될 수 있는 (인간의) 친근한 동료들서의 식물들이었다. 최소한도 또 중요한 방식들로 인간은 식물과 굳게 “결합되어” 있었다.

인간과 자연의 밀접한 만남의 비범한 예는 성(聖) 프란시스의 주목할만한 삶과 저작들이다. 그는 하느님의 임재를 발견하기 위해 외부 세계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동물과 식물을 전적으로 하느님께 이르는 인간의 여정을 위한 유용성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는 상징주의와는 달리 그는 이중의 시각, 즉 수직적 시각과 수평적 시각을 아울러 갖고 있었다. 그는 사물들을 하느님의 상징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으로도 보았다. 그는 제아무리 하찮은 피조물이라고 해도 모든 피조물을 형제나 자매라고 불렀다. 모든 피조물이 자기와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음을 그는 알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를 “인간해방 모델”의 하나로 보는 레오나르도 보프는 그의 독특성이 가난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있다고 주장한다. “가난은 존재의 한 방식, 즉 우리 인간이 사물들을 사물들 그 자체로 존재하도록 허락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사물들을 지배하고 종속시키고 권력의지의 객체로 만드는 일을 거절한다”고 보프는 말한다. “(한 개인의) 가난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그는 현실에 보다 가깝게 다가서고, 또 (자신과 만물 사이의) 차이점과 특징들을 존경하고 숭배하면서 만물과 교제하기가 더욱 쉽다. 프란시스의 우주적 우애는 그의 가난하게 됨의 방식의 결과이다.” “훌륭하고 자연과 친화력을 갖는 기독교인들”(super, natural Christians)이라는 내 표현의 의미는 가난에 대한 이런 이해에 매우 가깝다. 자연은 그저 인간을 위한 어떤 교리나 도덕적 교훈의 상징이 아니고 “그들 나름의 일을 하는” 존재들이다.

중세에 이중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 오직 프란시스만은 아니었음은 확실하다. 중세의 성례전주의는 자신의 뿌리를 희랍의 이중적 유산, 즉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전통에 내리고 있는데, 전자는 내세에 후자는 이 세상에 초점을 맞추었다. 플라톤은 자연이 자연을 넘어서 있는 영원한 이데아(idea)를 본떠서 만들어졌다고 보았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생명체들간의 수평적 연관을 파악하는 일에 착수했다. 자연에 대한 이 두 형태의 희랍적 사고 모두 위계질서적이고 잠재적으로 이원론적이었다(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는 남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끈질기게 주장함으로써 자연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을 합성했다). 어거스틴의 신플라톤주의는 확실히 수직적이고 내향적인 방향을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 충실함으로써 수평적이고 외향적인 동기들을 갖고 신플라톤주의의 그런 색채를 완화시켰다. 아퀴나스는 은총이 자연을 대체하기보다는 자연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았다. 창조 세계는 하나의 진흙덩어리가 아니라 오히려 개별적이고 유일무이한 존재들이 거주하는 하나의 극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강조점은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것, 즉 개별적이고 상이한 피조물의 가치가 아니라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서의 자연에 놓여진 것처럼 보인다. 어거스틴과 더불어 시작된 이 내적이고 수직적인 통로는 종교개혁(특히, 마틴 루터)을 거쳐 실존주의로 요약되는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자연은 고작 하느님의 구원을 위한 배경이나 무대 역할을 한다. 종교개혁에 반대한 중세 이후의 로마 가톨릭도 자연에 적대감을 품었다. 신의 행위는 초자연적인 것에 한정되며 자연은 단지 은총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다.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흥은 이 두 세계를 하나의 세계, 즉 세속적인 세계로 붕괴시켰다. 이 붕괴의 가장 두드러진 희생물은 자연일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한 실용적인 가치를 넘어서는 그 어떤 의미나 소명도 갖지 못한 그저 하나의 객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4. 현재: 자연을 상실한 우리들

오늘날 우리 세계는 문자적이 되었다. 한때는 의미가 풍부했던 “주체”가 이제는 분석되고 해부되어야 할 하나의 “객체”에 불과하게 되었다. 흥미롭고 의미심장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우리의 정신 속에 갇히게 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이 치명적인 구# 인해 자연은 주체성을 상실했다.

상상력에 아무런 경계를 설정하지 않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들던 단테와 밀톤의 그 찬란하게 낭만적인 우주는 이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색채와 소리로 충만하고, 향기로 진동하고, 기쁨과 사랑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고, 그 어디에서나 의도적인 조화와 창조적인 이상들에 대해 말하던, 한때 사람들이 몸담아 살던 그 세계가 이제는 산산조각난 유기적 존재들의 두뇌 속 아주 작은 구석들에 처박히게 되었다. 이제 외부 세계는 가혹하고 차갑고 무미건조하고 침묵하고 생명이 없는 세계, 양(量)의 세계,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한 기계적 규칙성의 동작들의 세계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에게 이 변화가 가져다준 어리둥절함이 어떠했을까를 오늘 우리가 상상하기란 어렵다. 가장 기본적으로 그것은 “고독”을 의미했다. 중세 사람들은 주체이신 하느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의 세계에 살았었다. 그 세계 안에서는 천사와 악마들은 물론 동물과 식물 역시 주체들이었으며, 인간 또한 주체들로서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은 외톨이가 되었다. 우리 역시 여전히 그렇다. 우리는 외톨이가 되는 데 익숙해지도록 자라난다는 것만이 다르다. 20세기 말 우리의 생태학적 위기는 이런 오랜 세월에 걸쳐 심화된 인간적 고독의 마지막 단계에 다름이 아니다. 예전에는 용이했던 내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 인간 세계와 자연 세계 사이의 교통이 이미 오래 전에 붕괴되었다. 예전에는 그 둘 모두가 비록 방식은 달라도 유사한 특성의 상상력과 주체성과 목적과 의미를 공유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신 속에 감금된 채 외톨이로 남았다.

현실이 변화하듯 언어 또한 변화한다. 자연이 살아있고 의미심장하며 우리에게 혹은 그 자체로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우리의 언어는 단조롭기 짝이 없다:

현대 이전의 인간의 우주는 다층이었다. 자연은 상징들로 풍부했으며, 여러 차원에서 읽혀질 수 있었던 자연물들은 감정이 실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와 대조적으로 과학은 자연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축소시키려고 애쓴다. 전통적 세계의 일상적 및 종교의식의 언어는 애매모호성과 풍요로움으로 충만했다. 반면에 현대세계는 투명하고 문자적이 되기를 열망한다.

과학의 언어가 자연의 언어가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가 자연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과학의 언어, 즉 수량화되고 “객관적인” 언어일 뿐이다. 자연의 세계는 귀납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에 의해 철저히 연구될 수 있으리라는 것이 과학의 언어에서는 당연시된다. 르네상스 이래로 은유와 상징과 이미지(心像)는 존재의 모든 수준간의 복잡하고 존재론적인 연관들을 암시하는 데 불필요한 단순한 장식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자연은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자연은 “단지” 하나의 객체, 수학 공식과 DNA로 환원될 수 있는 하나의 기계라는 우리의 결정에 거듭 반항할 것이다. 자연을 묘사하는 일반적인 표현들, 즉 세계를 묘사하기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이 점이 명백히 드러난다. 우리의 중세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 몸을 세계라는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으로 이해한다. 토마스 베리는 자연의 색채와 아름다움과 소리에 대해 말한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에게 하느님을 찬양하는 언어를 준다고 생각한다. 만일 우리가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달의 풍경 속에 산다면, 우리는 그런 언어를 갖지 못할 것이다. 참으로 옳다. 자연의 색채와 아름다움과 소리가 없이는 우리의 풍요로운 내적 삶 또한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연을 우리의 내면과는 엄연히 별개의 것, 우리의 인생길 순례의 다정한 동반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우리의 영향을 받는 또 하나의 주체로 여기지 않는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작품을 쓰는 배리 로페즈는 외부적 및 내적 “풍경들”에 대해, 한 사람의 삶의 모습과 성격은 “그가 이 땅에서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만지느냐, 자연 속에서 어떤 모습을 관찰하느냐에 따라 깊은 영향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관심 갖는 것은 단순히 자연에 관한 사실들이 아니라 자연 속의 다양한 요소들간의 관계들이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의 내적 풍경들에 미묘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외부적 풍경의 완전무결한 질서는 작은 것일 수도 혹은 큰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작은 것의 한 예를 든다. “목 부분이 검은 참새 한 마리가 한 그루 관목에 내려앉는다. 참새 아래의 그 작은 가지의 탄력, 우유 빛이 감도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관복이 드리우는 누르스름한 녹색의 그 정밀한 그림자, 날갯짓을 하며 윙윙 맴돌아 막 가지에 다가서려 하는 그 새의 아름다운 율동, 바로 이런 것들이 ‘풍경’이라는 나의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 하나의 풍경이 미치는 영향을 제대로 표현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며, 더욱이 그것은 장구한 세월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로페즈는 주장한다. 이보다 큰 것의 예로서는, 토착 민족들의 예술, 건축, 형이상학, 종교의식, 그리고 윤리가 다양한 풍경들을 본뜨는 방식들을 들 수 있다. 토착민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개인적 및 문화적 세계의 질서가 외부의 풍경에 대한 오랜 시간의 참을성 있는 관찰에서 유래한다. 예를 들어, 북미 인디언의 하나인 나바호족은 외부 우주의 질서를 마음 깊은 곳에서 기원하는데, 그들은 이 질서가 전혀 흠잡을 데가 없고 인간의 분석을 뛰어넘는 완전무결함을 갖고 있다고 이해한다.

나는 로페즈가 옳다고 믿는다. 우리는 외부의 풍경에 의해 깊이 광범위하게 영원히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자연이 중요하다. 제아무리 부정해도 자연은 우리에게 중요하다. 우리는 우리 몸에서 나온 은유들을 갖고 자연을 묘사한다. 자연과 동떨어져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자연은 우리가 거의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미묘하지만 깊이 영향을 미친다. 어떤 차원에서는 자연이 단지 객체가 아님을 우리는 확신하다. 핵심적인 쟁점이 보다 선명해지고 있다: 우리는 자연의 중요성을 인식함과 동시에 “사물들이 사물들 나름대로 존재하도록 용납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에 몹쓸 짓을 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가? 우리만이 홀로 주체들인가, 아니면 이런 타자들에게 진지하게 주체성을 부여할 수 있는가? 우리는 프란시스적 의미에서의 가난 의식(意識) 속에서 자신들 나름의 차이점과 독특성들을 갖고 있는 만물을 존경하고 숭배하며, 아울러 만물을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로서 바라보는 훌륭하고 자연과 친화력이 있는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가? 우리는 자연에 대해 외향적이 되며, 그 자체로서 또 그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자연계에 주의를 기울이며, “아울러” 만물이 상호 의존적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가?

이것이 주된 문제이며,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할 수 있기에는 너무도 동떨어진 곳에 있다. 우리의 주된 난점은 바로 내향성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 자신 속으로만 받아들인다. 동물들이 그 성격상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므로, 동물은 자연계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파악하는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동굴에 살 때에는, 동물들은 인간의 표현의 맨 처음 주제들이었다: 상징화에 대한 인간 최초의 시도였던 동굴 벽화들은 다른 인간들이나 신들이 아니라 동물들을 소재로 했다. 그들은 우리의 “타자”, 우리의 주된 관계였다. 우리 인간이 맨 처음 자신을 반영했고 이 세계에 대해 숙고했던 것은 바로 이 동물들을 통해서였다. 이보다 더 큰 중요성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초기의 원인론적 이야기들에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창조 이야기들에서 동물의 중요성이 엿보인다. 동물들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기원에 이르는 통로이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왔다. 그들이 없이는 우리는 “존재”(be)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인간이 동물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대해 쓰면서 존 버거는 현대인들이 동물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두 장소인 동물원과 집을 언급한다. 여기에서 현대인은 우리에 갇힌 동물들과 애완 동물을 바라본다. 야생의 타자(他者), 영적 상징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육체적 생명을 유지시켜 주기도 했던 그 동물을 향한 원시인들의 그 존경이 서리고 주의 깊었던 응시가 이제 오직 자신만을 유일한 주체로 여기고 그 밖의 모든 것을 객체들로 여겨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는 인간의 약탈적인 시선으로 변해버렸다. 액자에 끼워진 채 박물관에 걸린 그림들과 비슷하게, 우리에 갇힌 동물원 동물들은 보는 이들의 즐거움을 위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원의 동물들이 우리의 타자 곧 우리의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면, 애완 동물들 역시 그렇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애완 동물을 위해 고급 음식, 일류 의료, 호텔처럼 으리으리한 개집, 그리고 정성을 들인 장례 준비를 하는 데 매년 수십 억 달러를 소비한다. 많은 미국인이 그들을 자식으로 여기고, 따라서 그에 준한 대접을 한다. 그러나 동물들을 이런 식으로 다루어서는 동물들은 결국 인간의 소유물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권리를 가진 주체들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프란시스는 해와 물과 불을 자기 자식이 아니라 형제요 자매라고 불렀다. 그는 평등성을 가리키는 가족적 용어들로써만 그들을 불렀다. 차이점과 독특성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은 어느 정도의 거리를 요구한다.

17세기 이래로 동물들에 대한 서구인의 태도는 객체화와 감상주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동물원과 애완 동물이 그 각각의 실례이다. 이 둘 모두 내향성의 형태를 취한다. 이 두 경우 모두에서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 타자들을 내면화하고 소유하고 식민지화한다. 그들을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도 않고, 그들 나름의 욕망과 계획과 권리를 가진 주체들로 보지도 않는다. 동물들에 대한 이런 내향적 태도의 훨씬 더 극단적인 두 가지 예는 “동물성/야수성”이라는 개념과 월트 디즈니의 풍자 만화에 나오는 동물들이다. 전자는 부정적 형태의 내향성을, 후자는 긍정적 형태의 내향성을 보여준다.

동물성은 “스컹크처럼 술이 취한”과 같은 표현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실 스컹크는 술에 취하는 법이 없다. 오직 사람들만이 취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들 안에서” 발견되는 가장 혐오스런 것들인 고삐 풀린 성욕, 폭식, 폭력 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동물들을 사용해왔다. 남을 겁탈하고 폭식하고 살인하는 것은 오직 인간일 뿐인데도 우리 인간은 자신을 그런 행위들로 내모는 것은 바로 자신들 안에 있는 동물성(야수성)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려 든다. 동물성이 사람들 사이에 등급을 매기는 수단으로서 사용되는 것은 더욱 심각한 일이다. 흑인, 원시인, 어린 아이, 여성,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미친 사람은 동물적 존재로 받아들여져 왔고, 그래서 그렇게 취급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노예 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흑인 노예들을 동물로 여기는 것이 불가피했다.

동물을 보다 긍정적으로 내면화하지만 여전히 동물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디즈니의 풍자만화 증후군이다. 이 증후군에는 텔레비전과 영화의 풍자 만화만이 아니라 깜찍한 동물들이 제품을 파는 식의 광고에 동물 사용하기, 동물 그림책, 애완 동물원, 박제된 동물들, 슬픈 눈초리를 한 아기 물개들 따위의 동물을 소재로 한 달력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 모든 동물이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모든 동물이 영리하고, 귀엽고, 곱슬곱슬하고, 따뜻하고, 껴안고 싶고, 안전하고, 우호적이다. 이런 만화들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싶은 인간의 갈망을 투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실제 생활 및 동물들의 실제적인 욕구와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는 왜곡되고 감상주의적인 관계를 조장할 따름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고독에 대한 서글픈 주석이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야기시킨 지구 행성의 다른 주체들로부터의 고립에 대한 뒤틀린 인식이다.

지금 우리는 자연이 우리에게 중요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자연이 그 자체로서 자기 나름의 존재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고찰하고 있다. 토착민들 및 중세인들처럼 우리도 외향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또 우리의 영향을 받기도 하는 자연을 타자로서, 우리와 닮은 동시에 닮지 않은 하나의 주체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대인은 내향적 자세를 갖고 우리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연을 내면화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자연 상실, 차갑고 생명 없는 세계 안에서의 유일한 주체로서의 인간의 날로 깊어지는 고독을 추적했다. 자연을 타자로서 인식했던 원시 민족들의 외향성, 자연을 신적인 것의 상징으로 보았던 중세인들의 수직적 외향성, 다양한 욕구와 갈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연을 객체화하고 우리 정신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우리 자신의 내향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지금 우리는 또 하나의 길,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찾고 있다. 인간과 자연이 주체-주체들의 관계 속에서 상호 교류를 하는 길, 그렇지만 외향적이고 수평적인 길, 인간과 다른 자연의 독특성들을 존경하고 자연계의 모든 존재들이 그들 나름의 존재를 누리도록 용납하는 길을! 그들 나름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그들을 더욱 적절하게 돌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가 얼마나 상호 연관되고 상호 의존적인가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이런 타자들이 어떻게 때로는 신적인 것의 상징이 되는가를 또한 엿보게 될 것이다. 그런 감수성을 발전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프란시스의 발자취를 좇아 훌륭하고 자연과 친화력을 갖는 기독교인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감수성을 발전시키는 일에는 “사랑 어린 눈”, 인간과 자연계의 모든 타자들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는 동시에 둘 사이의 실제 차이들을 존경할 수 있는 눈이 포함된다.  

* 역자 소개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감리교 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으로 있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읽는 성서》 《함께하는 예배》 《오늘 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신 예수》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트로츠키》 《신비주의 신학》 《냉전과 대학》 《건강불평등, 사회는 어떻게 죽이는가?》, ≪아메리카, 파시즘, 그리고 하느님≫ 등의 번역서가 있으며, 《한국의 기독교 명시》 《세계의 기독교 명시》 등을 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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