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관한 시 모음> 손택수의 '아버지의 등을 밀며' 외

+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 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 번은 입 속에 준비해둔 다섯 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어쩔 줄 모르고 물 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 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손택수·시인, 1970-)


+ 아비
    
밥 대신 소금을 넘기고 싶을 때가 있다
밥 먹을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스스로에게 다그치며
굵은 소금 한 숟갈
입 속에 털어넣고 싶을 때가 있다
쓴맛 좀 봐야 한다고
내가 나를 손보지 않으면 누가 손보냐고
찌그러진 빈 그릇같이
시퍼렇게 녹슬어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내가 나를 질책하는 소리,
내 속으로 쩌렁쩌렁 울린다
이승이 가혹한가,
소금을 꾸역꾸역 넘길지라도
그러나 아비는 울면 안 된다
(김충규·시인, 1965-)


+ 아버지의 안경

무심코 써 본 아버지의 돋보기
그 좋으시던 눈이
점점 나빠지더니
안경을 쓰게 되신 아버지,
렌즈 속으로
아버지의 주름살이 보인다.

아버지는
넓고 잔잔한 바다 같은 눈으로
자식의 얼굴을 바라보신다.

그 좋으시던 눈이 희미해지고
돋보기 안경을 쓰시던 날
얼마나 가슴 찡하셨을까.

돋보기 안경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아버지의 주름살이
자꾸만 자꾸만
파도가 되어 밀려온다.
(이탄·시인, 1940-)


+ 아버지 보약

형과 내가 드리는
아침, 저녁인사 한마디면
쌓인 피로 다 풀린다는 아버지
'58년 개띠'입니다.

나이는 마흔하고 아홉입니다.
이제 오십 밑자리 깔아 놓았다는
아버지 보약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아버지, 잘 주무셨어요?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서정홍·아동문학가, 1958-)


+ 못 위의 잠

저 지붕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 봅니다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 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 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나희덕·시인, 1966-)


+ 아버지의 등

아버지의 등에서는
늘 땀 냄새가 났다

내가 아플 때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지만
아버지는 울지 않고
등에서는 땀 냄새만 났다

나는 이제야 알았다
힘들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아버지는 속으로 운다는 것을
그 속울음이
아버지 등의 땀인 것을
땀 냄새가 속울음인 것을
(하청호·아동문학가)


+ 아버지의 밥그릇  

언 발,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
봉분 같은 아버지 밥그릇이 쓰러졌다
늦은 밤 발씻는 아버지 곁에서
부쩍 말라가는 정강이를 보며
나는 수건을 들고 서 있었다
아버지가 아랫목에 앉고서야 이불은 걷히고
사각종이 약을 펴듯 담요의 귀를 폈다
계란부침 한 종지 환한 밥상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밥을 남겼고
우리들이 나눠먹은 그 쌀밥은 달았다
이제 아랫목이 없는 보일러방
홑이불 밑으로 발 밀어 넣으면
아버지, 그때 쓰러진 밥그릇으로
말없이 누워 계신다
(안효희·시인, 1958-)


+ 희망이네 가정 조사

우리 아빠는 회사가 부도나서
지금 일자리가 없다.

학교에서 가져온
가정 조사표에 열심히 대답하는 누나.

아버지의 직업은?
-지금 열심히 알아보고 있는 중임.

아버지의 월수입은?
-지금은 없지만 앞으로 있을 예정임.

누나의 눈동자 속에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다.
(박예분·아동문학가)


+ 아버지

고무판을 갈아주랴?
기름을 쳐주랴?
아버지는 기계의 마음을 안다.

아버지가 쓰다듬고
만져주면
콧노래 부르면서 돌아가는 기계

심장이 뛰는 소리
엔진 소리

기계처럼 순한 게 없지.
아버지 말을 잘 듣는다.
맡은 일을 두고 놀지 않는다.

기계의 숨소리로 가득 찬 공장
아버지도 기계와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 사신다.

비행기도 기선도
아버지가 기계를 달래어 만든다.
(신현득·아동문학가, 1933-)


+ 아버지

어릴 때
내 키는 제일 작았지만
구경터 어른들 어깨 너머로
환히 들여다보았었지.
아버지가 나를 높이 안아 주셨으니까.

밝고 넓은 길에선
항상 앞장세우고
어둡고 험한 데선
뒤따르게 하셨지.
무서운 것이 덤빌 땐
아버지는 나를 꼭
가슴속, 품속에 넣고 계셨지.

이젠 나도 자라서
기운 센 아이
아버지를 위해선
앞에도 뒤에도 설 수 있건만
아버지는 멀리 산에만 계시네.

어쩌다 찾아오면
잔디풀, 도라지꽃
주름진 얼굴인 양, 웃는 눈인 양
"너 왔구나?" 하시는 듯
아! 아버지는 정다운 무덤으로
산에만 계시네.
(이원수·아동문학가, 1911-1981)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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