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민중성 - 신앙의 눈높이 낮추기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하늘이 아니라 바닥! - 마태 25:31-46
                                
성경을 읽다 보면 군데군데에서 마치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폭탄이 터지는 듯한 마음의 충격을 받을 때가 있는데, 마태 25:31-46의 ‘최후심판 이야기’가 그 한 가지 실례다.

이 말씀이 담고 있는 신학은 그야말로 “세속적”이다. 마태복음 저자가 독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충격을 주기 위해 터뜨린 비장의 무기인 듯, 본문은 신앙의 거룩성과 초월성에 매몰되어 신앙의 지상성과 세속성, 물질성과 육체성을 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마태 공동체의 독자들에게, 또 우리에게 아주 또렷한 어조로 말한다. 주님은 우리 주변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 배고프고 목마르고 나그네로 떠돌고 헐벗고 병들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속에 계신다 것을!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 영원한 벌과 영원한 생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그렇다. 주님은 저 하늘에 계시지 않는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땅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 그들의 한숨과 고통과 눈물 속에 계신다. 주님은 그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아파하며 사랑의 손길을 기다리고 계신다. 주님은 역사의 변두리, 땅의 그늘진 곳, 가난과 소외의 구석진 곳에 성육신하셨고 지금도 거듭 성육신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주님과 접하고 있는 셈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마태 5:8)은 신앙의 눈으로 이 주님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했고 목회 경험이 풍부하고 신학 공부를 많이 했어도 땅의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 주변의 가난과 소외의 현장을 외면한 채 저 초월적인 하늘만 바라보는 자세로는 평생 주님과 만날 수 없을 것이다.

참된 신앙체험이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속에 예수님이 임재해 계심을 진심으로 깨닫는 일이다. 이 체험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이 체험을 하게 되면 우리의 인생살이는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하게 될 것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모습에서 예수의 모습을 읽으며 팔십 평생을 변함 없이 그들의 벗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체험 덕분이었을 것이다.

민중시인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 예수는 문둥이에게 말한다: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적한 이 시멘트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느니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신전의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서 내 입을 열었다. 네가 내 머리에서 금관을 벗겨내는 순간 내 입이 열렸다. 내가 네게서 구원받았느니라.”

전통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초월적 기독론을 민중적 예수론으로 뒤집는 시인의 신학적 상상력은 신성모독인가?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다정한 벗이었던 예수를 자꾸만 신격화해서 초월적 그리스도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예수를 진정 욕되게 하는 일이다. 세상 한복판에서, 역사의 밑바닥에서 민중 속에 성육신했던 예수를 “신전의 감옥”에 가두어 예수와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사이를 끝없이 갈라놓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 땅의 교회가 예수와 이 땅의 민중들에게 짓고 있는 큰 죄악이다.  

신앙생활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의 눈높이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모습으로 바로 우리 곁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저 하늘만 우러르는 신앙생활로 한평생을 허비한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깝고 어리석은 일인가.

하늘이 아니라 땅! 역사의 밑바닥! 삶의 변두리! 바로 여기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공염불에 그치고 말리라는 것을, 이웃사랑과 민중사랑으로 표현되지 못하는 예수사랑은 거짓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자.  


2. 가난한 이들의 숨결로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난 그 자체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숨결로 말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운명지어진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우리는 예수가 걸었던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의 사회적 처지가 그와 유사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지위는 그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언어는 복잡하기 그지없으나 예수의 언어는 단순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서글픈 것은, 바로 그 차이점을 우리가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호세 까르데나스 빠야레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인 1973년 봄부터 동네 친구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비록 아주 열성적인 신자는 못 되지만 주일만큼은 교회에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으니 최소한 주일 대예배 설교만 해도 이천 번 가량은 들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가난한 이들의 숨결”이 담긴 설교, “가난한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운명지어진 죽음을 맞이”한 예수를 전하는 설교를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리고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교에 입학한 1984년부터 지금까지 수백 권의 신학 서적을 한 줄 한 줄 밑줄 그으며 읽었다. 그런데 그 책들 중에 예수가 즐겨 사용한 “단순”한 이야기체로 “가난한 이들의 숨결”을 담고 있는 책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다. 대부분의 신학 서적들은 산문체의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들이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제는 내 나름대로 평가할 수 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난 그 자체”였던 예수와 “사회적 처지”가 별로 같지 않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의 눈에 “가난한 사람” 예수가 포착되기란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고. “우리의 언어는 복잡하기 그지없으나 예수의 언어는 단순했다”는 사실은 그저 언어 양태의 차이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훨씬 더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그렇다. 이 땅의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가난한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기존의 사회질서에 맞서는 혁명적 대안으로서 하나님나라운동을 펼쳤던 예수, 복음서에 뻔히 들여다보이는 그 예수를 이야기하려고 애쓰는 민중신학이나 해방신학이나 여성신학처럼 “가난한 사람”을 편드는 신학을 정통 교리와 신학의 이름으로 깔보고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비슷”한 게 아닌가 하는 의혹을 품게 한다.

우리 신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겸허한 자기 반성을 해야 한다.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우리는 예수가 걸었던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는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와 동떨어진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우리, “가난한” 예수와 배부른 우리 사이의 “차이점을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가난한 이들의 숨결”이 없는 설교와 예배와 기도와 찬양과 신학이 과연 성서적·복음적일 수 있을까?

“가난한” 예수의 재발견, “단순”한 예수 이야기로의 복귀,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희로애락을 함께” 하는 교회로의 전환! 이건 교회가 교회답기 위한 필수 요소가 아니겠는가.


3.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 그것은 가난한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눔과 평등과 자유에 기초한 사랑과 평화와 만인의 친교의 따뜻하고 인정(人情) 넘치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운동이다! 그 무슨 신학과 교리를 갖고서도 복음서의 각 페이지들마다 기록되어 있는 이 명백한 사실을 뒤엎지는 못할 것이다.

예수는 부잣집 아들이 아니라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수 탄생 소식을 천사의 입을 통해 맨 처음 전해 들은 사람들은 들판에서 밤을 세워가며 양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이었다(눅 2:8-12). 예수의 부모가 아기 예수를 주님께 바치면서 드린 것은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이었다(눅 2:24).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고 예수는 말했다(눅 9:58).

예수의 메시아 취임사 첫마디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였다(눅 4:18). 예수는 가난한 제자들을 향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했다(눅 6:20). 예수가 친히 가르쳐 준 주기도문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는 눈물겨운 기도가 들어 있다(눅 11:3). 예수의 별명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다(막 2:16).

예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마음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그들의 아픔과 예수님의 아픔이 만나 나눔과 사랑과 치유의 기적이 일어났다. 예수는 그들 위에 군림하지 않았다. 고상한 도덕적 설교로 그들을 훈계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그들의 오랜 세월 숨죽인 아픔을 제 아픔으로 느끼며 그들에게 믿음을, 새 삶의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예수가 전한 복음이 그들에게는 한줄기 구원의 빛이었다.

그러나 가진 자들, 배운 자들은 예수를 걸고넘어지기에 바빴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눈엣가시로 여겨졌고, 그들의 드높은 학식은 예수의 단순 소박한 하나님 나라 “비유”들을 이해하는 데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를 그대로 살려 둔다는 것은 곧 그들 세계의 종말을 의미했으므로.

예수 시대에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편드는 사람은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가난한 이들의 인간적 권리 회복을 위해 몸바쳐 헌신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기는커녕 그들의 사상을 의심하고 비방하고 감옥에 처넣는 세상! 인간의 의식이 많이 깨인 오늘날에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이천여 년 전 예수가 가난한 이들과 한몸 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겪어야 했을 비방과 박해와 고독은 얼마나 크고 깊었을까!

예수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하고 요구했다(막 8:34). 무슨 십자가? “가난의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마 6:24)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면서 가난한 이들의 벗으로 살아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복음적 가난이 참된 신자의 길이 아니겠는가.

물론 예수는 가난의 예찬자는 아니었다.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다. 굶주림은 해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내 주변에 굶주린 이들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겠다는 것이 예수의 한결같은 자세였다.

오늘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은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다정한 벗의 관계인가, 아니면 낯선 타인의 관계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 절묘한 구원의 진리는 복음서의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마태 25:31-46의 “최후의 심판”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두렵다. 예수를 위해 한평생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가난한 사람들과는 늘 안전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나.

민중사랑 없는 예수사랑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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