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 마태 16:24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우리는 어떤 물건을 살 때 그 물건에 붙은 상표를 확인한다. 더러 가짜 상표가 붙어 소비자를 우롱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떤 상표이냐에 따라 물건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도가 결정된다. 비슷한 품질의 물건들이라고 해도 제각기 상표에 따라 가격이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교회도 하나의 상표를 내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슨 상표? ‘십자가’가 바로 그 상표다. 교회마다 십자가 종탑을 우뚝 세우고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십자가야말로 교회의 교회다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는 빼어난 상징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왜 십자가에 달렸을까? 예수의 역사적 생애는 왜 십자가처형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건으로 귀결되었을까?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야말로 이 세상을 참으로 구원할 분이라는 우리 기독교의 전통 신앙에 담긴 뜻은 뭘까?

먼저 우리는 십자가를 낭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자. 십자가는 안일한 자세로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결코 아니다. 십자가는 로마 제국이 제국의 견고한 유지를 위해 고안한 무시무시한 사형틀이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 예수가 ‘정치범’이라는 낙인이 찍혀 십자가에 처형된 그 사건은 신앙고백의 관점에서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오묘한 섭리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신앙고백이 진정 우리의 삶과 역사를 역동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이유를 끈질기게 따져 물어야 한다.

예수는 세상 권력자들의 미움을 사서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 예수의 일거수일투족은 당시 역사의 권력자들의 목에 비수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일체의 권력과 제도와 이념과 가치와 종교에 맞서서 매사에 생명사랑·인간사랑·민중사랑의 깃발을 내걸고 싸움을 거는 예수의 하나님나라운동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부와 권력을 틀어쥔 그들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직의 기본 조건으로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무슨 말인가? 예수의 십자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모름지기 예수의 제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를 따르는 삶에는 피할 수 없는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 정신으로 산다는 것, 즉 ‘그때 거기’에서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던 예수의 바로 그 해방 실천의 삶을 우리가 ‘지금 여기’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힘차게 밀고 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들 스스로는 아무런 십자가도 지지 않으면서 예수의 십자가에 힘입어 구원을 받겠다는 것은 종교적 탐욕이다. 이것은 역사 한가운데에서 역사의 모순과 치열하게 싸웠던 예수의 해방 실천의 삶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우리 몫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역사 앞에서 책임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서 이루어진다. 십자가 없는 구원, 십자가를 지지 않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주체적인 해방 실천이 없이는 우리의 구원 또한 없다.

오늘 당신은 당신 몫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만일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할 수 없다면, 당신은 아직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당신 몫의 십자가를 지지 않고서도 예수의 대속적 십자가의 은총을 이야기하며 한평생 믿음 좋은 신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억하라. 그것은 기막힌 자기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사실이 중요한 것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도록 인간을 사랑했다는, 이 세상을 사랑했다는 사실이다"(이현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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