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하나님, 작은 예수 - 가난한 여성들의 신앙고백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200그램 죽 속에 있는 하나님

"매일 낮 열두 시쯤 그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200그램 죽의 모습을 하시고." (인도의 한 여성 신자)  

그녀의 이런 하나님 고백은 전통신학에서 이야기하는 전지전능하고 거룩하고 초월적인 하나님을 깔아뭉개는 신성모독적 발언인가? 자신의 허기진 배를 채워 주는 "200그램 죽"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느끼는 그녀의 소박한 생활신학은 세련된 종교언어로 추상적인 신학적 개념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들의 이론신학보다 열등한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그녀의 하나님 고백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는 뜻을 조용히 묵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매일 낮 열두 시쯤 그 찌는 듯한 열기 속에서."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느 날은 존재했다가 어느 날은 존재하지 않아도 그만인 명멸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매일" 하나님을 느낀다. 그 느낌이 있기에 그녀는 가난하고 고달픈 삶 가운데서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그녀를 하루하루 살게 하는 구체적인 생명의 힘이다.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그녀의 생활신학은 1인칭이다. 그녀는 하나님에 "관해서" 3인칭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그녀의 하나님 고백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신학적 유희가 아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울부짖었듯이, 그녀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내게" 오시는 하나님이다. 저 하늘에 초연한 모습으로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매일" "내게" 오시는 다정한 하나님이다.

"200그램 죽의 모습을 하시고."

그녀의 신학은 추상적이며 관념적이지 않다. 물질적이며 구체적이다. 그녀의 신학은 거창하고 현란하지 않다. 그야말로 작고 소박하다. 그녀는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해 세련된 종교언어를 동원하거나 교리를 들먹이지 않는다. 그녀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명하기 위해 머리를 짜낼 필요가 없다. 그녀는 그녀를 살게 하는 "200그램 죽"에서 생명의 하나님을 느끼고 체험한다. 그녀의 삶과 하나님은 아무런 거리를 두지 않고 밀착되어 있다. 하나님은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그녀의 삶과 동행한다. 아니, 하나님은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말없이 먹혀 그녀의 여린 생명을 지탱시켜 준다. 하나님은 그녀의 밥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밥이다. 하나님은 공허한 관념이 아니다. 하나님은 배를 곯는 사람들에게 밥으로 오셔서 그들을 살리시는 물질이다. 하나님은 세상살이에 지쳐 절망한 사람들에게 희망으로 오셔서 그들에게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정신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별 볼일 없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다정한 친구로 오셔서 그들의 멍든 가슴을 어루만지시는 따뜻한 손길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그들의 삶의 원동력이 되신다. 하나님은 예수, 성령, 노동자 전태일, 마더 테레사 수녀, 문익환 목사, 그리고 "200그램 죽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생명과 사랑과 자유와 평등과 정의를 이루어 가신다.      

다시금 묻는다. 그녀의 하나님 고백은 신성모독인가?

대만의 민중신학자요 문화신학자인 송천성은 말한다. "삶 자체가 신학의 원자료다. 신학은 삶 자체에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 요인들을 다루어야 한다. 신학적 두뇌로만 이해할 수 있는 추상적 개념들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문제라면 그 어떤 것도 신학에 부적당하거나 중요성이 없다고 판결해선 안 된다. 신학은 하늘이 아닌 땅과 씨름해야 한다.... 살아 있는 인간 상황과 무관한 신학이라면 그것은 이론신학일 뿐이다. 이런 종류의 신학은 머리를 기쁘게 해줄 수 있을지언정 영혼을 울리거나 가슴을 찌르는 신학이 될 수 없다.... 아시아의 신학이 밥을 거부한다면 그 신학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병이 들고 말 것이다."

신학만 그럴까? 신앙도, 목회도, 예배도, 선교도 "하늘이 아닌 땅과 씨름해야" 하는 게 아닌가. 나의 신앙, 나의 목회는 혹시 "밥"을 거부한 나머지 "영양실조"에 걸려 있지나 않은지 깊이 반성할 일이다.

2. 바카스 한 병의 예수 - 어느 여공의 간증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 발견하고
    깨달아 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고 신비하게 말이죠.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는 한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신 자신의 입으로도 늘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17세에 혼인하여 세 아이를 낳고 살다가
    서른도 못되어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요즘 우리 엄마는 새벽 네시 반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장사하러 나갑니다.
    시장 바닥에 나가면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삶의 현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때부터 어깨에 무거운 짐, 보따리를 메고
    그 넓은 시장바닥을 돌아다닙니다.
    가게나 노점 상인들에게 물건을 팔 비닐봉지를 나눠주고
    일일이 수금을 하러 다니는 일입니다.
    엄마의 나이(58세)나 체력에
    너무나 딸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 쉬는 추석날 같은 날은
    병으로 앓아 눕는 날이 되어버립니다.
    지금은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등도 휘어졌습니다.
    겨울에도 한데를 돌아다니므로
    두 볼엔 얼음이 박혀 발갛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너무 고달프고 힘들게 그리고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보입니다.

    이런 엄마를 보면, 나는 내 공장 친구들이
    18시간 혹은 24시간 일할 때의 그 표정마저 없어지는
    피곤한 얼굴들이 생각납니다.
    일하는 사람들은 절망과 혐오에 사로잡힐지라도
    결코 쉬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짜로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자신이 절망해보았고, 늘 가진 자들에게 멸시당해왔고,
    그리고 자신이 비참한 지경을 겪어왔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고
    멸시당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압니다.
    그리고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끊임없이 절망하는 심정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세계는 이루어져갑니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그 박동을 느끼며
    그리고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느낍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힘이 있고
    그리고 지치지 않을 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지금 내려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를 생각해봅니다.
    어릴 적에는,
    구름을 타고 옆에는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린 채로
    찬란한 빛과 웅장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은빛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오시리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신다면 글쎄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도
    서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피곤한 우리 엄마에게
    바카스를 쥐어주실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시끄러운 우리 공장에서 멍청히 일하는 내 옆에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와서
    살짝 내 일을 도와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터전 내 신앙, 우리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하는 삶,
    일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기장회보> 1983.4.)
        
"구원"이란 대체 뭘까요?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은 우리 인간의 내면에서 신비롭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태어날 때부터 원죄의 그늘 아래 있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 우리 인간은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흘리신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의지함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요?

한 “여공”이 고백합니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 속에서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그 박동을 느끼며 그리고 우리가 인간임을 느끼고 그리스도를 느낍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힘이 있고 그리고 지치지 않을 끈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구원"은 평면적이 아니라 입체적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구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구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하기 위해 고상한 신학 언어나 교리를 끌어들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일하는 사람들", "역사의 숨결", "진실로 사랑하는 힘", "지치지 않을 끈기" 등의 구체적인 삶의 언어, 역사의 언어로 구원을 "이야기"합니다.

그녀는 "한이 많은 사람"인 자신의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간증을 시작합니다. "17세에 혼인하여 세 아이를 낳고 살다가 서른도 못되어 남편과 사별하"고, "새벽 네시 반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그때부터 어깨에 무거운 짐, 보따리를 메고 그 넓은 시장바닥을 돌아다"니는, "나이나 체력에 너무도 딸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졌고 등도 휘어"진, "정말 너무 고달프고 힘들게 그리고 별 볼일 없이 살아가는 인생으로 보"이는 어머니.

그녀는 "이런 엄마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공장 친구들"을 떠올립니다. "피곤한 얼굴들", "절망과 혐오에 사로잡힐지라도 결코 쉬는 법이 없"는, "자신이 절망해보았고, 늘 가진 자들에게 멸시당해왔고, 그리고 자신이 비참한 지경을 겪어왔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고 멸시당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일하는 사람들". 그녀는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자신과 자기 주변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조금씩 발견하고 깨달아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녀도 "어릴 적에는" "그리스도인 예수"가 "구름을 타고 옆에는 수많은 천사들을 거느린 채로 찬란한 빛과 웅장한 음악이 울리는 가운데 은빛 나는 하얀 옷을 입고 오시리라 꿈꾸었습니다." 정통 기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그리스도론 혹은 신성(神性)으로 충만한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한때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힘겨운 "여공" 생활을 하고 고단한 "삶의 현장"을 하나 둘 통과하면서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영광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은 사라지고 그 대신 고난의 예수, "일하는 사람들", "절망한 사람", "멸시당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진실로 사랑하는 힘"과 "지치지 않을 끈기"가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예수에 대한 신앙이 언제인가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하여 "만약 그리스도이신 예수가 지금 내려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를 생각해" 보면서,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고백합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서도 서서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피곤한 우리 엄마에게 바카스를 쥐어주실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시끄러운 우리 공장에서 멍청히 일하는 내 옆에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와서 살짝 내 일을 도와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카스" 한 병의 예수!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의 예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본질상 동격인 초월적인 능력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동하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희망하며 그들을 말없이 "도와" 주는 연대성과 섬김의 예수. "자신이 비참한 지경을 겪어왔기 때문에, 절망한 사람을 진실로 사랑할 줄 알고 멸시당하는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예수.

복음서가 이야기하는 예수는 바로 이런 예수가 아니겠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 곧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예수가 신성을 가졌다거나 뭔가 신비한 능력으로 우리의 삶의 문제들을 우리 "대신" 해결해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가 비록 만 33년의 고달프고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 삶을 통해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그 박동을 느끼며" 정말이지 "인간"답게 살아 역사와 인간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켰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면 우리가 구원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듭니다." "삶의 터전 내 신앙, 우리 그리스도는 바로 이 일하는 삶, 일하는 사람들 속에 있다고 생각됩니다."

당신은 당신의 의식주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어느 누군가의 "일" 곧 노동의 산물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며 살고 계십니까. 당신의 "신앙"은 당신의 "삶의 터전" 구실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일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고 또 "역사의 숨결"을 감지하십니까.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당신과 이 땅의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하고 있습니까.

혹시 당신은 구원을 "일하는 삶"과 동떨어진 그 무슨 신비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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