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1)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1. 초월적 하느님에서 초월과 내재의 하느님으로

1) 우리가 하느님을 어떤 개념으로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적 삶의 정체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에도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적 삶은 주로 믿는 것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관계 맺음에 관한 것인가? 다시 말하면, 그것은 하느님을 우주와 분리된 초자연적 존재로 믿는 것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바로 여기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영(the Spirit)과 관계 맺음에 관한 것인가? 혹은 그것은 “저 바깥에 계신”(out there) 하느님을 믿는 것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바로 여기에 계신 하느님과 관계 맺음에 관한 것인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하느님을 초자연적 유신론의 틀 속에서 생각해왔다. 하느님을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예배와 기도의 자연스러운 언어를 통해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성서 구절들로부터 자연스럽게 추론된 결과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하느님을 “저 바깥에 계신” 초자연적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장애물이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의 실재(實在)를 의심스러운 존재로 보이게 만들 수 있고, 또한 하느님을 아주 멀리 계신 분처럼 느끼게 만들 수 있다.
(존 쉘비 스퐁, 김준우 역,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2)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에서는 하느님의 초월성만을 강조하고 하느님의 내재성은 부정한다. 하느님은 세계와 다르며 세계와 분리되어 있다. 하느님은 “저 바깥에” 계시며, 여기에 계시지 않다. 범재신론(panentheism, 汎在神論)에서는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긍정한다. 하나를 긍정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부정하거나 종속시키지 않는다. 범재신론에서는 하느님은 우주 이상이면서도 동시에 우주 안의 모든 곳에 현존한다. 범신론은 하느님의 내재성만을 긍정하고 본질적으로 하느님의 초월성은 부정한다. 하느님은 모든 것 속에 현존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 이상은 아니다. 그러나 범재신론은 초월성(타자성)과 내재성(현존)을 동시에 긍정한다. 사실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범재신론이 정통 기독교의 근본적인 하느님 개념으로 보인다. 범재신론은 참으로 초자연적 유신론에 의해 제기된 지적 난관의 상당 부분을 해결한다.

하느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긍정하는 것은 초월성의 의미에 영향을 준다. 초월성은 하느님이 어딘가 다른 곳, 여기가 아닌 저 바깥에 존재한다는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초월성은 그분이 때로 우리의 경험 지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일상적 경험 세계를 훨씬 뛰어넘는 신비스럽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하느님은 “우리의 한가운데 있는 너머”(beyond in our midst)이다(본회퍼). 하느님은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지만 “바로 여기에” 계신다.

하느님을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분, “바로 여기에”(right here) 계신 “저 너머”(the beyond)의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적 삶의 이미지로 인도한다. 기독교적 삶은 본질적으로 신념체계나 요구사항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삶은 사후의 일을 위해 “저 바깥에” 계신 어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범재신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기독교적 삶을 관계 속에서 이해하게 만드는데, 이러한 이해야말로 참되고 동시에 깊은 의미에서 기독교적 삶에 생명력을 제공한다. 초자연적 유신론으로부터 범재신론에 이르는 나 자신의 기독교적 여정은, 경험적으로 그리고 지성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확신에로 나를 인도했다: 하느님은 실재한다. 기독교적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려진 하느님과의 관계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관계성은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3) 유배기 이후의 예배는 외부적인 하느님을 향하지 않고 우리 인간 공동체 세계를 향하는 예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예배는 천박한 인본주의를 초래하지 않고 하느님을 궁극적으로 발견할 장소는 우리 인간성의 깊이라는 인식을 낳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예배에서는 삶에서 탈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삶을 확장시키려는 모든 시도가 생겨날 것이다.

하느님이 종교 기관의 특별한 소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가갈 수 있는, 생명의 중심에 현존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므로, 미래의 예배는 덜 위계적(hierarchical)이며 보다 더 원과 같은(circular) 것이 될 것이다. 미래의 예배는 교파적 특성과 영역을 놓고 다투는 일에서  어쩔 수 없이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왕과 같은 이미지들과 그 겉치레를 버리게 될 것이다. 교회가 하느님을 대변하거나 하느님의 유일한 은총의 통로인 체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진리에 대한 협소한 주장을 변호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보편적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헌신할 것이다. 교회는 성서를 그 믿음의 조상들이 하느님을 예배하기 위해 추구했던 기록으로 간주하여 귀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성서의 문화적·제의적 한계들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거룩하신 분의 계시는 정경(正經) 성서가 마감됨으로써 끝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미래의 예배는 사람들을 충만한 생명에로 부를 것이다. 예배는 종교라 부르는 특별한 행위를 지지하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게 될 것이다.    

예배의 변화는 과거의 의식에서 생겨난 하느님 체험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하느님 체험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예배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는 하느님 체험이 우리를 경외감과 놀라움으로 인도하며, 우리의 삶을 한계나 시간을 초월하는 상태로 인도한다는 깨달음이 포함될 것이다.
(존 쉘비 스퐁, 김준우 역,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2. 교회 중심에서 하느님 나라 중심으로

1) 전체 세계를 위한 그 완전한 형태에서 신적인 구원 경륜의 궁극적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이다(루돌프 쉬나켄부르그). 그리스도가 전파했던 것은 하느님 나라였는데 그 대신 교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알프레드 로이지).

2) “부활 이전의 시기, 그의 생애 중에 예수는 교회를 설립하지 않았다.... 자신의 모든 사목 활동을 통해 그는 부활 이후의 교회의 출현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한스 큉). 예수와 교회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정리하는 일이 신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회론의 신학적 과제가 된다. 부활 이전의 역사적 예수는 교회를 바랐는가? ‘교회’라는 말이 은총, 해방, 성령의 역사, 새로운 창조, 하늘의 예루살렘,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뜻한다면, 그리스도는 교회를 원했다. 그러나 ‘교회’라는 말이, 그 나라의 은총에 대한 봉사로서의 가시적 제도, 성사적 조직, 교계적 사목 제도, 그 사회학적 구조들, 그리고 그 신학적 자기 이해를 뜻한다면, 이 물음은 전혀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레오나르도 보프, 김쾌상 역,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성요셉출판사)

3) 예수에게 있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현실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 나라는 할례, 정결음식법, 안식일법 준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 또한 그 나라는 아무 중개자 없이(unbrokered) 하느님과 관계하는 나라이므로 성전이나 제사장은 쓸모없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 세상을 개종시켜 교회를 세우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도록 요청하지도 않았고 세례를 베풀지도 않았다. 그는 핵심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했을 테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성만찬이란 것을 처음 시작하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가 전통 기독교와 연관된다고 생각하는 것들 가운데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은 매우 적다. (로버트 펑크, 김준우 역,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77쪽.)

4) 교회의 본질은 조직이나 기능이 아니라 운동(movement)이다. 교회의 본질은 브로커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운동이며 예수운동이다. 이 운동을 위해 교회는 조직과 기능을 갖는 것이다. (김준우 교수)

5)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 불의한 사회 속에서 의로운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 전부를 망라하지 못한다. 하느님 나라는 교회라는 범주를 뛰어넘는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서 예수의 인간성으로  

1) 전통적 기독론의 형성에서는 예수의 역사적 삶을 진지하게 다루지 못했다. 이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어떻게 이론적(관념적)으로 이해할지에 관심을 가졌던 개인주의적이고 지적인 엘리트들의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에게는 새로운 기독론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독론은 살과 피를 지닌 인간 예수의 역사를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신비에 싸인 예수의 삶에서 그 베일을 벗기고 그 진면목을 드러내야 한다. (엘라꾸리아).

2)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은 그들의 편의에 따라 예수님에게 적어도 다섯 가지 옷을 입혀 왔다.

첫째, 근본주의의 옷을 입혀 왔다. 우리는 예수를 빙자하여 우리 안의 이견자(異見者)들을 이단(異端)으로, 불순분자로 정죄하여 왔다. 예수를 독선주의자의 전형으로 높이 받들어, 그를 자(尺)로 사용하여 창의적인 생각과 행동을 하는 자매·형제를 차별해 온 것이다. 역사적 예수는 율법주의자, 위선자, 독선주의자들을 그토록 질책하셨는데도, 우리는 예수에게 근본주의자의 옷을 두텁게 입혀 놓았고, 독선주의의 아성에 단단히 가두어 버렸다. 예수님을 이 옷, 이 성에서 하루 속히 해방시켜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에게 신비주의의 옷을 입혀 왔다. '저 세상'을 실제로 가고 싶지 않으면서도, 종교적으로 그토록 사모해 왔기에 '이 세상'을 그토록 증오해 온 우리들은 예수님을 신비주의자의 모범으로, 세속 혐오주의자의 전형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이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사 세상으로 오신 예수님을 저 세상 구름 너머로 쫓아내고 말았다. 성육신(成肉身)의 예수가 탈육신(脫肉身)의 예수로 둔갑하여 구름 너머 있는 신비주의의 아성에 갇혀 있게 된 것이다. 하루빨리 이 성에서 예수님을 탈출시켜, 낮고 천한 무리들과 즐겁고 자유롭게 열린 잔치를 마련하도록 해야 한다.

셋째, 너무나 오랫동안 종교적 이기주의 옷을 입혀 왔다. 나 하나 예수 잘 믿고(따르기가 아니라) 천당 가려는 그 영악한 종교적 탐욕은 이기적 예수를 치받들고 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현세에서도 축복 받고 저 세상에서도 극락을 누릴 수 있게 하는 분으로 예수를 활용하고 있다. 이 옷을 하루 빨리 벗겨 드려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예수에게 강자(强者)의 옷을 입혀 왔다. 강자와 승자를 숭배하고, 부자와 권세 가진 자를 축복하는 전형으로 예수를 모셔왔다. 쿠데타로 집권한 강자들을 위해 재빠르게 조찬기도회를 베풀어 주는 교회 지도자들이 특히 강자 예수를 사모한다. 항상 승리하는 예수는 무슨 방법을 활용하든지 간에 세속 권세를 틀어쥐고 있는 자들을 축복하는 예수로 둔갑한다. 이 옷을 입고 괴로워하시는 약자의 참 친구 예수로부터 그 옷을 벗겨 드려야 한다.

다섯째, 서양 문화의 옷을 입혀 왔다. 예수라면 으레 우리는 하얀 피부의 백인종, 날카로운 콧대를 지니고 푸른 눈을 가진 서양인 예수를 생각한다. 이런 예수가 머리 되는 교회가 바로 서구 교회다. 서양의 봉건주의 구조, 그 후의 자본주의 구조와 침략적 제국주의 구조, 특히 타종교를 박멸시키려 했던 십자군 구조의 한 중심에는 언제나 그 구조의 총 우두머리로 백인 예수를 떠받들고 있다. 이 서양 옷으로부터 하루 빨리 예수님을 해방시켜야 한다.
(한완상, ‘괴로운 옷을 입고 계신 예수’,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이사장)

3) 원시교회가 하느님을 발견한 것은 한 인간 존재 안에서였다. 인간 나사렛 예수는 ‘오직 하느님만이 그토록 인간적일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고 심오한 모습을 자신의 인성 가운데 계시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인격의 참된 뿌리와 참된 인간성에 대해 익히게 된다. 예수의 신성에 대한 우리 신앙의 기초는 심오하게 인간적인 그분의 모습, 이 세계 내에서의 그분의 철저한 인간적 행동 방식에 자리잡고 있다.
(레오나르도 보프, 황종렬 역,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4) 우리가 ‘인간적’(human)이라고 부르고 또한 ‘신적’(divine)이라고 부르는 자질들은 서로 배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들은 서로 통하는 것인가? 인간성과 신성은 서로 통한다. 하느님은 내가 접근하고자 하는 한 존재, 즉 바깥에 계시며 초자연적이며 유신론적 존재는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은 내 인생의 심층적 차원에서 발견되는 현존(presence)이며, 생명의 잠재력, 사랑의 능력, 존재의 용기 속에서 발견되는 현존이다. 하느님의 의미를 궁극적으로 계시한 것은 바로 예수의 존재, 예수의 완전한 인간성이었다. 예수는 나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하신 생명이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주님”과 “그리스도”라고 부르며, 내게 하느님을 보여주신 분이라고 주장한다.
(존 쉘비 스퐁, 김준우 역,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 한국기독교연구소)    

5) 신앙은 인간을 인간화하고 인간으로서 완성시키고 인간의 고유한 사명을 깨닫도록 한다. 신앙과 인간의 성장 사이에는 아무런 분열이 없다. 신앙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인 생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적인 삶과 희망과 행동이다. 신앙은 인간 정신의 혁명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단지 위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을 변화시킨다. (도로테 죌레)


4. ‘오직 믿음’에서 ‘오직 사랑’으로  

1) 하느님의 이름이나 종교가 구원을 주는 게 아니라 구원을 주는 것은 사랑이다. (솔렌티나메 농어민들의 복음대화).

2) 이 세상에서 사랑은 상실되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 이것이 복음이다. (미구에즈 보니노)

3) 예수가 선포하는 복음은 사랑이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하는 소식이며, 증오와 파괴와 착취와 억압과 같은 악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의 능력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하는 소식이다. (구티에레즈)

4) 사랑이란 단순히 감상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비참한 생활 조건을 만들고 있는 기본적인 경제적 사회적 구조들을 변화시키려는 의식적이고 지성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신앙은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성취된다. 그리고 사랑은 실제적인 효력이 있어야 한다. (까밀로 토레스)

5) 기독교의 사랑은 단순한 감상적 느낌이 아니고 옳은 일을 행하는 정의의 행위라는 것을 신학이 분명히 밝히지 못한다면, 그 신학은 복음을 충분히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정의라는 용어로 표현되어야 한다. 교회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비폭력 방법으로 경직된 체제에 의미 있게 압력을 가하는 일을 시작하고 지원해야 한다. 교회는 마땅히 대규모 시민 불복종 운동을 시작하고 지원해야 한다. (알란 부삭, 흑인 신학자)        

6) 예수 경험은 사랑의 경험이었다. 이 사랑은 생명을 긍정하는 강력한 실재였다. 그 사랑은 모든 인간의 장벽을 제거하고 모든 사람의 편견을 없애버린 그런 사랑이었다. 그 사랑은 인간의 영혼과 심성을 심원한 변화에로 초대했다. 그런 사랑이 불러일으킨 것은 개방성, 편견의 소멸,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고 완전한 접근을 허락하는 인간성, 그리고 어떤 사람도 고립시키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내용의 진수(眞髓)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예수는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이것이 바로 동정녀 탄생, 성육신, 삼위일체 따위의 신조의 개념화된 언어로 나타내려 한 근원적 경험이었다. 각종 신조의 언어들이 거룩한 게 아니라 그 언어 뒤에 있는 경험이 거룩한 것이다. 그 경험이 거룩함을 만나는 곳이다. 그 사랑의 무제약적 내용을 직접 살아보는 경험을 거치지 않고 단지 예배에서만 사랑이신 하느님께 접근할 수는 없다.

예수는 우리를 개방하여 좋은 일을 하다가 상처 입을 것도 각오하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시다. 이런 예수의 능력은 각 시대마다 알려지고 경험된다. 내가 이런 그리스도를 경험한 것은, 교회라는 세계에서 밀려난 변두리를 돌아보면서, 하느님의 교회로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척받은 희생자들에게 나 자신을 열었을 때였다. (존 쉘비 스퐁, 한성수 역,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국기독교연구소)


5. 십자가를 바라보는 교회에서 십자가 처형을 기억하는 교회로

1) 한국교회가 이원론적 신앙과 잘못된 축복관에 사로잡혀 있고, 교인들 스스로 목사의 카리스마에 사로잡혀 지내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결국 잘못된 신학에서 비롯되었다. 그 핵심은 역사적 예수, 인간 예수에 대한 기억이 교회와 신학에서 사라지거나 무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기억,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으로 시작되었다. 다른 존재가 아닌 바로 십자가에 달린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예수, 십자가의 예수는 사라지고 하늘의 초월적 그리스도, 부활의 주님만을 숭배하고 있다. 한국 기독교의 모든 왜곡은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고, 성령체험이 강렬하고, 교회가 성장하더라도 그 안에 구체적 인간 예수의 모습이 없다면 모두 가짜에 불과하다. (길희성 교수)

2) 기독론은 예수의 신비를 파악하려는 시도다. 십자가에 처형된 갈릴리 출신의 예수의 그 무엇이 그리 특별한가? 그리스도의 중요성은 신성과 인성을 겸비한 그의 두 “본성”이 아니라 그의 “행함”에서 드러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은혜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 기독론에서 벗어나 행동과 실천을 지향하는 기독론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우리는 전통적인 도그마(교리)에서 벗어나 이야기로 기독론을 풀어 가야 한다. (도로테 죌레).

3) 예수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며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난 그 자체였다. 그는 가난한 이들의 숨결로 말했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희노애락을 함께 했으며, 가난한 이들에게 운명지워진 죽음을 맞이했다. 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성서를 해석하는 우리는 예수가 걸었던 길을 가고 있는가? 우리의 사회적 처지가 그와 유사성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지위는 그 당시 지배계급이었던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과 비슷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언어는 복잡하기 그지없으나 예수의 언어는 단순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와 일치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말해 준다. 무엇보다도 서글픈 것은, 바로 그 차이점을 우리가 조금도 염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호세 까르데나스 빠야레스)

4) 한마디로 복음서는 “그리스도론”의 전개에 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수 민중운동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예수와 민중은 주객 관계가 아니라 함께 사건을 일으키는 “우리”이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 사건은 예수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사건이다. 그 사건에 가담하지 않으면 그 의미를 모른다. 십자가의 사건을 핵으로 삼고 있는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정치적 성격과 그 민중사건성을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또 이른바 부활경험은 예수의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인식되지 못한 사건이다.
(안병무, 『민중신학이야기』, 한국신학연구소)        

5)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의 부활 기록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증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탄생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교회는 오순절 날 120명 예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데서 시작되지요. 언제 뒷덜미를 잡힐지 몰라 숯불에 올라앉은 새처럼 오들오들 떨던 제자들,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숨죽이고 숨어 있던 것들, 그 가운데는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오리발을 내밀던 겁쟁이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몇몇 여인들을 제외하고는 모두들 뿔뿔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던 하나같이 겁쟁이들이었습니다. 그 겁쟁이들이 하루아침 잠갔던 문을 박차고 나와서 “예수는 죽지 않았다”고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성서는 그것을 예수의 부활과 성령강림이라고 하지요. 이 둘은 둘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그들 몸 밖에서 일어났던 예수의 부활이 그들 속에서 그들의 부활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다시 사신 예수의 뜨거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몸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령이란 바로 예수의 뜨거운 마음인 거죠. 그래서 교회를 “다시 사신 예수의 몸”이라고 하는 것 아닙니까? 죽었던 제자들, 죽었던 갈릴리 어중이떠중이 민중이 예수의 뜨거운 마음을 받아 다시 살아나는 데서 교회가 탄생했다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부활이 민중의 부활이 되는 데서 시작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의 뜨거운 마음, 뜨거운 가슴, 뜨거운 정의감, 뜨거운 사랑으로 다시 살아난 민중이라는 말입니다. 교회란 예수와 함께 죽어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민중이라는 말이죠. 민중과 함께 죽어 민중과 함께 다시 산 예수의 몸인 거죠. 예수로 다시 살아난 민중이요, 민중으로 다시 살아난 예수인 겁니다. 별 볼일 없는 갈릴리의 어중이떠중이, 힘없는 사회의 밑바닥 천덕꾸러기들이 대로마 제국 속으로 누룩처럼 무섭게 퍼져 들어갈 수 있는 데는 바로 그런 비밀이 있었던 것입니다.              
(문익환,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민사, 68-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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