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 - 어느 농민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어느 농촌 품팔이, 그는 농토가 없었다.
    왜 땅을 잃어버린 농사품팔이꾼이 되었는지, 그 사연도
    그 자신만이 알고 있으리라.
    그는 곧잘 취해,
    주정도 잘 부리고 신앙도 별로 없다고 했다.
   
    그를 내가 만난 것은
    그의 죽음을 1개월 남짓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는 정부에서 베푸는 극빈자 양곡을 배급받아 먹고사는 것이
    유일한 생활수단이었다.
    그의 셋방은 십자가 탑도 웅장한 어떤 교회 바로 밑이었다.
    그의 부어오은 배와 짙은 감귤 색깔의 눈은,
    그의 병세가 심각함을 즉각 느끼게 했다.
    귀가 철벽인 그의 아내는 눈물만 닦으며
    “50평생 찌든 가난과 괴로움의 삶이 너무 야속하고 무정타”고
    넋두리다. 망설이는 그를
    “돈이 없어도 진료 받을 수 있다”고 설득시켜 가까스로
    면 단위 보건소로 안내했다.

    젊은 의사는 친절하게
    황색 표지의 극빈자 무료 진료카드를 제시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런 카드를 받아본 사실이 없다고 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가?
    면사무소 담당자 앞으로 뛰어가 항의했다.
    내일이라도 발급하겠다는 확답이었다.
    진찰결과는 예상한 대로
    위암에 간 기능마저 엉망이란다.
    우선방편으로 주사와 약을 처방해줄 테니
    2차 진료기관으로 속히 옮기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찰료는 무료이지만 투여한 약값은 내야 된다고 했다.
    주머니를 털었다.
    이튿날 황색 카드를 발급 받고 대학병원으로 인도했다.
    안도의 숨과 함께 접수창구에 카드를 들이밀자
    거절당했다.

    극빈 무료진료자 접수시간은 오전 11시가 마감인데
    시간이 지났다는 것이다.
    응급실로 뛰었다.
    간단히 거절당했다.
    파김치가 되어 움직일 수도 없는 그와 아내를 부추기고
    비포장도로 50리를 되돌아와야 했다.
    이튿날 9시 30분, 시간을 맞추어
    면진료소 의사의 의견서와 황색 카드를 접수창구에 들이밀었다.
    그런데 주민등록증을 보잔다.
    그는 자기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지 근 1년이 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거절이다.
    그는 돌아가자고 한다. 그래도 대학병원까지 와봤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에는 끈적끈적한 물기가 흐른다.
    말소된 그의 주민등록증의 행방을
    찾아서 뛰어다니던 어느 날, 나의 수고도 허사가 되어
    그는 가을 찬비가 추질추질 뿌리던 날 육신의
    마지막 고통을 어금니로 씹으며 한 많은 생을 마쳤다.
    주일마다 새벽마다 잘도 울리는
    교회의 종탑 밑에서....

    그의 아내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임종 때에
    “목사님의 노고를 봐서라도 예수 믿고 눈 감으라”는
    그의 아내의 간절한 바램에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라고 했단다.
    (‘어느 농업 노동자의 죽음’, 기장회보, 1983.5.)


“농토가 없었”던 “어느 농촌 품팔이.” “곧잘 취해, 주정도 잘 부리고 신앙도 별로 없”는 그. “정부에서 베푸는 극빈자 양곡을 배급받아 먹고 사는 것이 유일한 생활수단이었”던 “그의 셋방은 십자가 탑도 웅장한 어떤 교회 바로 밑”에 있었습니다.

“그의 부어오른 배와 짙은 감귤 색깔의 눈은, 그의 병세가 심각함을 즉각 느끼게 했”습니다. “위암에 간 기능마저 엉망”인 상태입니다. 그러나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그는 그 흔한 병원 문턱 한 번 넘어 보지 못했습니다. 이런 기막힌 삶의 현실에서 “귀가 철벽인 그의 아내는 눈물만 닦으며 ‘50평생 찌든 가난과 괴로움의 삶이 너무 야속하고 무정타’고 넋두리”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망설이는 그를 ‘돈이 없어도 진료 받을 수 있다’고 설득시켜 가까스로 면 단위보건소로 안내했”습니다. 그러나 “황색 표지의 극빈자 무료카드”도 없는 그, “주민등록증을 분실한 지 근 1년이 넘”어 결국은 “주민등록”이 “말소”된 그는 “대학병원”에서 연거푸 “거절”만 당했습니다. “그래도 대학병원까지 와봤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가에는 끈적끈적한 물기가” 흘렀습니다.

결국 그는 “육신의 마지막 고통을 어금니로 씹으며” “주일마다 새벽마다 잘도 울리는 교회의 종탑 밑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쳐”습니다. “목사님의 노고를 봐서라도 예수 믿고 눈 감으라”는 “아내의 간절한 바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라는 외마디를 남긴 채 말입니다.
“곧잘 취해, 주정도 잘 부리고 신앙도 별로 없”었던 그. “임종 때”에도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라고 끝내 신앙을 거부했던 그.

우리에게 과연 그를 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까. 끝내 예수를, “예수 천당”의 오묘한 구원의 진리를 거부했으니 그의 영혼은 지옥의 지글지글 타는 불 속에 떨어졌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아니, “십자가 탑도 웅장한 어떤 교회 바로 밑”에서 구구절절 기막힌 삶의 “사연”들, 가난의 비애와 육신의 질병과 “거절”당하기를 밥먹듯이 하는 인생살이의 온갖 서러움을 간직한 채 많은 날들을 신음했을 그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토를 달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 얼핏 우리 기독교인들의 귀에는 몹시 거슬리게 들리거나 혹은 불경스럽게까지 느껴질 수도 있는 그의 이 저주스런 말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 31-46절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는 “주님” 곧 “예수”를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40, 45절)와 동일시합니다. 이런 사람 하나에게 어떻게 대했느냐에 따라 의인과 죄인이, 천국과 지옥이 결정됩니다. 이것만이 “심판”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유신론자냐 무신론자냐, 신자냐 불신자냐가 심판의 기준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 상상력에 기댄다면, “어느 농촌 품팔이”가 곧 예수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느님의 어린 양”(요한 1:29)입니다. 역사의 온갖 모순을 제 몸에 힘겹게 짊어진 채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삶을 살다가 숨을 거둔 고난의 예수입니다. 그의 하루하루 고달픈 인생살이가 곧 십자가요, 그의 죽음이 곧 예수의 죽음이며 하느님의 죽음입니다.

모르긴 해도 무식쟁이였을 그가 던진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라는 외마디. 이 외마디는 배부른 신학자들이 여유작작하게 둘러앉아 하는 지적(知的)인 신학 논쟁이나 철학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른바 신(神) 존재 증명보다 수백 배 수천 배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 존재 증명을 천 번 만 번 하는 것보다는, 신의 살아 계심을 믿는 신앙 때문에 우리의 삶의 자세가 고달픈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관심과 애정을 갖는 방향으로 손톱만큼이라도 변화되는 게 수천 배 수만 배 더 중요합니다. 과연 신이 존재하느냐 안 하느냐 살았느냐 죽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과연 우리 인간들이 서로에게서 신적(神的)인 것, 거룩한 것, 그 무엇에 의해서도 짓밟히거나 무시당할 수 없는 인격과 생명의 고귀함을 느끼고 서로를 귀히 여기며 살아가느냐 아니냐가 문제입니다.   

“목사님의 노고를 봐서라도 예수 믿고 눈 감으라”는 “아내의 간절한 바램”마저 외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아마도 그는 “주일마다 새벽마다 잘도 우리의 교회의 종탑 밑에서” 삶의 온갖 비애와 고독과 소외감에 시달리면서 “교회”에 대해, 기독교인들에 대해, 예수에 대해 적개심이 서서히 깊어갔던 모양입니다.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 교회는 무슨 놈의 교회! 교회 없어. 기독교인은 무슨 놈의 기독교인! 기독교인 없어....

그렇습니다. 그에게 “예수”는 없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예수”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사랑과 인정(人情)이 메마른 현실에서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는 “예수”란 자신의 “셋방” 너머로 들려오는 기도나 찬송가에나 나오는 알 수 없는 존재일 뿐이지 적어도 자신의 삶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존재, 그러므로 없어도 그만인 존재, 아니 결코 존재하지 않는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예수는 무슨 놈의 예수! 예수 없어.”

우리 인간들이 서로에게 따스한 정을 베풀 줄 아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로 살아가지 않는 한 예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인간다움을 믿고 또 몸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예수는 고정 불변의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예수라는 이름에 기대어 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 여하에 따라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생성적인 존재”(becoming being)라는 걸 늘 명심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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