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갱신을 위한 패러다임 전환(2)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6. 성직자의 교회에서 평신도(만인사제직)의 교회로

1) 사제의 카리스마는 근본적으로 ‘직책의 카리스마’이다. 또한 종교적 제도나 전통으로부터 떨어져서 말하는 예언자와 달리, 사제 계층의 일원으로서 공동체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사제의 역할은 대체로 전통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기울어 있다. 천주교의 역사가 웅변하듯이, 천주교는 변화와 개혁을 선호하지 않는다. (강인철, ‘종교권력과 한국 천주교회’,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2) 교계 제도에 의해 통제되고, 그 하위자들은 규범을 지키고 관행에 따르기만 하면 되는 거대한 조직을 교회라고 한다면, 이것은 현재의 교회를 잘못 본 것인가? 거의 그렇지 않다. (이브 꽁가르).

3) 마가복음의 본문에는 베드로의 고백만 있을 뿐 그리스도의 약속(“잘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 마태 16:18)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주목하자(마가 8:27-30). 베드로를 교회의 반석으로 설명하는 것은 원인론적 설명에 해당한다. 베드로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고백했던 탓으로 공동체에서 이 이름을 얻었다. 마태 공동체에서 베드로에게 맡겨진 권한은 교리적 권한을 뜻한다. 마태 16:18-19은 부활 이후의 공동체의 작품 또는 공동체의 성찰이다(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115-6쪽.)

4) 일반신자, 수도자, 신부, 주교 모두가 공동 책임을 가지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을 수 없고 모두가 동일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라는 집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주교, 신부, 일반신자, 수도자를 막론하고 우리 각자는 집을 이루고 있는 벽돌 한 장일 따름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엮음, 『하느님 나라의 일꾼』, 일과놀이, 58쪽.)

5) 나는 어느 누구도 위에서 아래로 요술 지팡이를 휘두를 수 없는 그런 교회를 원할 것이다. 세계는 권위주의적이고 교권적인 공적 생활형태로부터 변해가고 있지만 교회는 전혀 변하지 않고 있다. 언어조차도 로마 제국주의 시대 이래로 변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느냐를 지시해 주는 대신, 출산 억제나 인공유산 같은 중요한 문제들에 대한 최대한의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존 도미닉 크로산, 한인철 역, 『예수는 누구인가?』, 한국기독교연구소, 229-230쪽.)

6) 예수는 뚜쟁이가 불필요한 하느님 관계를 가르쳤다. 성직자 혹은 교회, 교단 등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있는 일체의 권위, 곧 하느님 나라 뚜쟁이들을 거부했다. 그러나 신약은 이를 무시하고 당시 교회에서 교권을 잡고 있던 자들의 권위를 보호하려고 애쓴다. 부활하신 예수가 누구누구에게 나타났다는 보도가 바로 그렇다.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기독교, 그 종교의 내용은 정말로 나사렛 예수에게서 시작된 것인가? 혹은 그 후대의 교회 지도자들의 ”투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인가? 예수 이후의 교회들처럼 우리도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 행동,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대중적 신조주의는 예수의 기적적인 출생, 공인된 기적들, 피의 제물로 이해되는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 몸의 부활, 그리고 우주적 재판을 위한 예수의 재림 등을 주장했다. 이런 교리들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역사적 예수로부터 유래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이것들 가운데 어느 것을 예수가 정당하다고 인정할 것인가?
오늘날과 같은 기독교의 대중적 형태는 자기를 뒷받침하기 위해 예수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사실상 예수를 허락하지도 않는다. 교리주의는 예수의 죽음만을 예외로 하고 전혀 예수의 말씀들과 행적들과는 무관한 신화들로 예수를 대체시킨 종교, 예수를 폐기 처분한 종교다.
나는 나의 신앙이 중고품 신앙이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신앙의 기원을 베드로나 바울 등의 처음 신자들에게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는 신앙에 대해 근본적으로 불만족스럽게 생각한다. 진정하고 근본적인 신앙은 어떤 식으로든 나사렛 예수에게까지 직접 연관되어야 한다.
나는 예수가 본 것, 혹은 그가 들은 것, 혹은 그가 느낀 것, 즉 너무 매혹적이고 그토록 그처럼 도전적이어서 예수를 완전히 사로잡았던 그것을 발견하고 싶다.
(로버트 펑크, 김준우 역, 『예수에게 솔직히』, 한국기독교연구소.)

7) 주님과의 만남은 내게 있어 하늘과 땅이 만나는 날카로운 첫 키스였습니다. 주님과의 첫 키스는 한용운의 시처럼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으며 전 세계가 뒤바꿔져버리는 대변혁이었습니다... 오늘 신앙의 위기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우리를 대신해 미리 대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봉사와 희생으로 스스로 신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나 사찰만 살찌우고 신도의 마음은 위선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이제 종교는 초기의 가난한 종교, 말씀을 직접 구하는 종교로 가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믿어 복받을 것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돌아가 항상 우리 삶에, 진리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소설가 최인호).


7.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1)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예수와 바울이 열어 놓은 복음의 본래 모습 곧 인간을 자유와 사랑으로 부르는 우주적·세계적 보편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적 분파와 같은 기독교에 가깝다.

타종교에 대한 태도를 배타주의, 포괄주의, 다원주의와 같이 도식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위험성이 있지만, 한국교회는 최소한 포괄주의까지는 나아가야 한다. 이는 도덕적으로도 절박한 문제다. 자기의 조상들은 우상을 숭배해서 지옥에 갔고 자신은 예수 믿어 천당 간다는 신학이나 신앙이론은 종교적 영성은 그만두고라도 윤리적으로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성서의 철저한 유일신론적 입장에서 보면, 한국사는 하느님의 우주적 섭리 속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한국의 조상들도 하느님의 섭리 아래 살았던 것인데 마치 하느님이 선교사와 함께 한국 땅에 들어오셨다는 식의 타종교에 대한 편협한 배타주의적 사고는 반드시 타파해야 한다. 현실의 교회 전체가 종교 다원주의로까지 나아가는 것은 현 단계에서 무리가 있겠지만, 세계교회협의회(WCC)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포괄주의적 입장으로까지는 열린 자세로 시급히 전환해야 한다. 참된 종교 간의 대화와 협동은, 타종교에 대한 개방성을 갖되 자기가 귀의하는 종교에서의 깊이 헌신하는 종교인들 사이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김경재 교수)

2) 그리스도를 교회만이 독점할 수는 없다. 현대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가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이 꼭 교회라는 제도에 몸을 담아야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보편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관련된다. 그래서 현대 가톨릭은 포괄주의적 입장에서 모든 종교와 문화의 선한 가치들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도록 가르친다. 외부에서 보는 한국기독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대표되는 편협한 배타성과 독선의 집합체일 뿐이다. 배타주의는 또 반문화주의, 반지성주의, 권위주의와도 관계될 것이다. (길희성 교수)

3)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따지고 앉아 있는 것은 마치 해가 이미 중천에 훤히 떠 있는데도 그것이 언제 뜰 것인냐를 따지는 것과 같다. 신학자 폴 닛터(Paul Knitter)의 말처럼, 종교간의 관계는 이제 적자 생존(the survival of the fittest)의 관계가 아니라 협력자 생존(the survival of the most cooperative)의 관계로 넘어왔다. 정치적 불의와 억압, 경제적 불공평, 생태계 파괴 등 인류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기 앞에서 각 종교가 서로 자기만 옳다는 독선적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종교는 온 인류와 함께 공멸의 길을 달릴 뿐이다. 이에 각 종교는 서로 협력하여 이런 난국을 함께 대처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어야만 한다. (오강남, 종교학자)

4) 사람들이 선과 정의, 인도주의적 사랑, 연대, 친교, 일치, 그리고 사람들간의 이해를 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그들이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이 세계를 더 인간적이고 형제적인 세계로 만들려 하며 자신들의 삶을 위해 규범적 초월자에게 스스로를 개방하고자 투신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우리는 지극한 확신을 가지고 그곳에는 부활하신 분이 현존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의문스럽고 심지어 단죄받을 만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와 오늘의 이 세계의 종교들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제의와 행하심에 직면한 인간 존재들의 종교적 응답을 대변한다. 교회는 그들로부터, 예를 들면 인도의 신비사상과 불교의 내적인 해탈 같은 다른 종교들에서 더 잘 주제화되어 온 종교 체험의 여러 양상들과 차원들을 배워야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교회는 참으로 가톨릭(catholic)적인 것, 즉 보편적인 것이 될 것이다.
(레오나르도 보프, 황종렬역,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분도출판사, 286, 334-5쪽.)

5) 얼마 전 기독교 시민단체와 문화운동단체 사이에 대중문화와 관련된 논쟁이 있었다. 문화운동을 하는 이들이 답답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독인들은 이미 진리를 전제하고 출발하기 때문에 대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인 스스로 진리를 선험적으로 규정해버리는 형태를 신앙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진호 목사, 한백교회)

6) 성경이나 교회의 신조들이 모두 영원한 진리를 가리키고는 있겠지만, 그 진리를 마침내 포착하지는 못한다. 성경이나 전통을 전혀 오류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교회의 권력과 통제를 떠받치려는 시도일 뿐, 결코 진리를 보전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실제로 진리를 어떤 단어들, 개념들, 혹은 신조들 속에 동결시키려는 사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진리를 왜곡시켜 마침내는 멸절시키고야 말 것이다. 시간과 언어의 포로로부터 해방되어 상대주의의 바다에 자유롭게 떠돌도록 허락된 진리만이 주관주의의 유린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어제의 경험을 오늘의 사고방식에 맞게 들어올릴 수 있는 새로운 언어를 끊임없이 불러내는 진리만이 마침내 살아남을 것이다.
(존 쉘비 스퐁, 한성수 역, 『성경을 해방시켜라』, 한국기독교연구소, 238-239쪽.)

7) 복음서에서 예수는 자유를, 해방을, 정의를, 평등을, 사랑을, 개혁(변혁)을, 나눔을, 친교를, 우정을, 연대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라는 말은 오직 해방, 오직 정의, 오직 평등, 오직 사랑, 오직 개혁(변혁), 오직 나눔, 오직 친교, 오직 우정, 오직 연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되어 마땅하다. 복음서에서 예수라는 의미가 담고 있는 이런 역사적 함축들을 외면한 채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구원의 대열에 들어서지 못한다’는 식으로 편협한 종교적 해석으로 일관하는 것은 그야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될 것이다.

8) 예수살기 모임을 통해 오늘 우리 시대에 주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겸허하게 배우려 했고, 새롭게 다가오는 미래가 어떤 희망, 어떤 세계관으로 무장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어렴풋한 깨달음을 얻었다. 적어도 지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적그리스도적 상황일 것이고 이에 반해 종교는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의 종교는 작금의 자본주의에 물들어 그들과 짝하여 가는 모습이 아니어야 한다. 인간뿐 아니라 온 우주와 자연이 함께 구원에로 나아가게 하는 종교여야 한다. 인간의 독선과 오만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하느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오염된 지구가 살아나며, 인종과 성차별이 극복되고,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더 이상 나뉘지 않는 신천신지의 희망을 주는 종교여야 한다. 모든 대립과 투쟁이 종결되고 화해와 평화가 추구되도록 가르치는 종교여야 한다. 언어와 전통, 문화의 장벽을 넘어 서로 용납하고 존중하며 참여와 연대를 통해 합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종교여야 한다.
(이승복 목사, 『새 세상을 미리 사는 교회 - 한울림교회 창립 10주년 기념자료집』, 도서출판 예수살기, 60-61쪽.)

9) “모든 형태의 제국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학적 제국주의도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된다”(올더스 헉슬리). “종교간의 대화 없이 종교간의 평화가 있을 수 없고, 종교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으며, 세계 윤리 없이 인류의 생존이 있을 수 없다”(한스 큉).


8. 남성 중심의 가부정적 교회에서 남녀 평등의 교회로

1) 예수 그리스도는 모름지기 여권신장 운동가였다. 우리가 예수의 태도를 고대 유대 사회의 조건과 비교할 때, 예수의 태도는 전율할 만하다. 예수의 많은 비유와 표상들에서 여성은 주도적인 역할을 맡은 자로 나타난다. 여성에 대한 예수의 태도는 여성의 평등성과 존엄성에 대한 그의 존중을 보여준다. 그의 모든 전도 활동에서 예수가 강조했던 것은 인간 존재들 사이의 모든 구분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진실로 예수는 새 인격을 결정함에 있어서 생물학적·성적 요소가 의미를 갖는 것을 명백히 배제했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마태 12:48-50).
(레오나르도 보프, 김쾌상 역,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성요셉출판사)

2) 바울의 주장들(고전 11:5; 14:34-35; 딤전 2:11-12)은 그것이 쓰여졌던 세계, 여성은 아예 시민권도 갖지 못했던 세계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 문화가 바울의 살과 뼈에 스며 있다. 바울은 그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그밖에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시간적으로 결정된, 즉 역사적으로 제약된 주장들로부터 보편적 규범을 이끌어내려는 것은 역사를 동결시키고 결과적으로 역사를 파괴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신앙과 신학, 그리스도교 메시지와 그 사회적 표현, 그리스도교와 제약되고 한정된 언어적·문화적 세계 안에서 구체화된 형태들을 구분해야 한다. 이런 구분은 교회 안에서의 여성의 위치에 관한 현재의 논의에 필수 불가결한 가치를 지닌다. (레오나르도 보프,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

3) 여성의 자기 실현을 위한 우리 시대 최대의 장애물은 가부장적 교회, 성직 중심의 교권 체계다. 따라서 오늘의 교회가 속죄하고 실천에 옮길 회개의 첫 단계는 가부장적 문화, 남성 위주의 권위주의 문화, 성직자 중심의 여성차별 문화를 극복하여 참된 인간평등 문화를 교회 안에 뿌리내리는 일이다. 여성들의 아픔과 고민, 사색과 깊은 성찰은 교회와 사회 등 모든 기존의 문화를 정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창조적 계기를 마련하는 게 분명하다. 이것이 바로 여성신학이 지닌 창조적 가치다. (함세웅, 『멍에와 십자가 - 교회의 사회비판적 기능』, 빛두레)

4) 세례 받은 사람들 모두가 교회이고 그 모두가 교회의 실천에 대해 책임이 있다. 여성들이 스스로를 교회로서 이해하고 교회에서 스스로 단순히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교회를 “여성들의 공동체(ecclesia of women)”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다. (엘리자벳 피오렌자)

5) 교회는 또한 예수의 복음에 의해 해방된 사람들의 해방공동체이고, 공동체 내의 모든 구성원이 자유하고 평등한 삶을 누리는 민주 공동체요 정의로운 평화 공동체이다. 부활한 예수의 몸인 교회 안에는 몸이 활동하도록 하기 위한 여러 지체들이 존재한다. 이 모든 지체들의 직무와 기능은 각기 다르지만, 각 지체들 간의 관계는 그 지위에 있어 우열이 있지도 않고, 어느 한 지체가 다른 지체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또한 교회는 목회자와 평신도, 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그리고 그 외의 모든 구성원들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평등하고 서로 함께 조화를 이루어 평화롭게 살며,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고, 서로를 위하고 봉사하며,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향린교회 신앙고백 선언’ 중)


9. 성찬식의 교회에서 열린 밥상공동체로

1) 언뜻 보기에 일흔 살쯤 되어 보이지만, 실은 마흔 살밖에 되지 않은 어느 부인이 미사가 끝난 후 신부에게 다가와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신부님, 저는 먼저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 성체를 모셨습니다.” ... “정말 배고파 죽을 지경입니다. 그런데 신부님이 성체를 나눠 주시는 것을 보고, 성체인 그 하얀 밀떡 조각을, 굶주림을 조금이라도 채워볼 욕심으로 그냥 받아모시고 말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신부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였다. 신부는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음식이며 나를 먹는 사람은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보프 형제, 김수복 역, 『해방신학입문』, 한마당, 13쪽.)

2) 만일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추상적 강론으로만 하느님 나라를 설파하셨다면, 그들은 하품을 하면서 그의 곁을 일찍 떠나갔을 것이다. 그들이 구름처럼 예수님 곁으로 모였던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실천, 감동적인 실천이 그들 몸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열린 밥상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었고, 무상의 치유 행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열린 밥상 공동체에서 밑바닥 인생은 자기들이 주인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다. 주님께서 그들을 주격으로, 주인으로, 존엄한 존재로 대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자유를 맛보았다. 비록 이와 같은 경험이 당시 기득권 층에게는 추문이었겠지만 그들에게는 복음이었으며, 기득권 층에게는 불온하고 불경한 도전이었겠지만 그들에게는 희망과 정의의 초대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대안(對案)이기도 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열린 밥상 행위와 오늘 우리들의 성찬예식을 연결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의 성찬예식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죄사함 행위를 높이 기리기 위해 시행된 것이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 교회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흘리셨던 피를 상징적으로 마시고, 그 몸을 상징적으로 나눠 먹는 예식을 제정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성찬예식은 그리스도(부활 후의 예수)의 구속행위를 기리는 계기였다. 죄 사함을 받으므로 천당에 가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다. 성찬예식에는 부활 전의 예수님, 특히 열린 밥상 공동체를 실천으로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없거나 희미하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예수님의 열린 밥상에는 진짜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진짜 민중이 그곳에 초대되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포용성과 평등성이 있었고, 특히 그의 사랑, 곧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이 넘쳐흘렀다. 밥상 공동체 참여자들은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느꼈다. 그런데 오늘 제도교회에서 의식화된 성찬예식에는 진짜 음식이 없다. 그곳에는 예수님 모습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듯하면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지난 이천 년 간 제도교회는 성찬예식을 통해 신앙의 그리스도만 기려온 셈이다. 역사의 예수와 그의 열린 식탁 공동체는 잊혀지고 만 듯하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예수님의 밥상 앞에 나와 그 분의 열린 뜻, 정의로운 마음을 체휼(體恤)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하느님 나라의 거점이 될 수 있다.
(한완상, 새길교회 1999년 설교 모음 『약속하시는 하느님』, 도서출판 새롬)

3) 성서는 해방의 삶, 그 감격적 체험의 회상이며 기록이다. 성서는 출애굽의 해방체험에서 출발하는 선조들의 삶에 대한 기억의 끊임없는 반복이며 그 삶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다. 미사 또한 기억이다. 슬픔과 감격의 끊임없는 재현이다. 예수의 삶, 특히 죽음을 눈앞에 둔 예수의 고뇌와 애절한 호소,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약속의 생생한 기억이다.

예수에 대한 기억은 예수의 삶 전체에 대한 기억이어야 한다. 예수의 신앙관, 세계관, 역사관, 인간관, 종교관, 사회관, 정치관 전반에 걸친 생생한 기억과 재현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미사를 너무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다. 미사는 결코 교회 건물 안에서 의식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미사는 예수사건, 삶의 현장, 역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예수사건에 대한 기억이다. 구체적으로는 유대 관헌들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불안과 공포, 초조 가운데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었던 저녁 만찬 때 일어난 사건의 기억과 재현이 바로 미사다.

미사 중의 경건심, 성체께 대한 최선의 예의는 곧바로 일상생활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루 세끼 먹는 식탁의 자리에서 경건한 마음을 갖고 이웃과의 나눔을 다짐하고 연대적 기쁨을 확인할 때, 성체신심의 실천적 뜻이 되살아난다.
(함세웅, 『칼을 주러 오신 예수』, 빛두레, 18-19쪽.)

4) 우리는 아직도 성찬식을 연구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첫째, 성찬식의 떡과 포도주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비스러운 만나가 아니다. 그것들은 나무에서 방금 따낸 사과도 아니요, 꼭지를 틀면 흘러내리는 물도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것들은 재배되고 성장하고 제품화된 물건이다. 포도주는 짜내야만 하고 떡은 구어져야만 한다. 그것들은 포장되어야 하며, 그리고는 트럭 운전수에 의해 사람들이 일하며 교통 경찰관이 순찰하는 고속도로로 운송되어 결국 우리에게 실려 온다. 즉 예수께서 우리에게 현존하시는 떡과 포도주를 우리는 전적으로 이 세계에 의존해서 얻는다. 우리는 이 세계 없이는 행동할 수 없다. 트럭 운전수, 경찰관, 빵 굽는 사람, 포장하는 사람, 그리고 이 물건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게 해준 모든 사람들이 없이는 우리는 행동할 수 없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에 대해 잠깐만 생각해 보아도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예수께서는 그런 것들이 있는 세계에서 오늘 우리에게 현존하신다.

둘째, 이 떡과 포도주는 떼어지고 부어졌다. 이 물건들이 떼어지고 부어지는 일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 세계 안에서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극적인 방법을 보게 된다. 화체설(化體設)이나 성체공존론(聖體共存論)에 대한 논쟁은 우리에게 전혀 의미가 없다. 현대 세계에서 우리는 이런 본질의 범주 문제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동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떡을 들어 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해 쪼개진 내 몸이다.” 우리가 이 떡에 동참함은 쪼개짐에 참여하는 일이요, 인간들의 학대와 조롱과 멸시와 거절에 참여하는 일이다. 잔에서 포도주가 부어질 때도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우리 자신이 쪼개지고 부어지도록 허용하는 우리의 무력함과 우리의 허약함이야말로, 우리가 여기 이 떡과 포도주에서 배울 수 있는 사실이다.

셋째, 이 떡과 포도주는 먹고 마심으로 우리의 몸 안에 섭취될 수밖에 없다. 그것들은 소화되어 우리의 혈구(血球)와 미분자(微分子)의 일부가 된다. 우리가 포도주와 떡을 그대로 “보존”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생명의 일부로 만든다.

넷째, 이 떡과 포도주는 정신적 품목이 아니요, 당신들이 손으로 만지고 보고 먹을 수 있고 실체가 있는 물건이다. “오, 주님은 얼마나 선하신가를 맛보고 살펴보라!” 신의 “샬롬”과 화해를 증거하면서 치유와 완전성에 일치하려는 사람들로서 우리가 적개심이라든지 소외, 또는 쪼개짐의 순간에 육체적으로 현존하는 일이 필요하다. 프랑스의 테제 공동체는 정치적 긴장이 있고 경제적 착취가 자행되는 곳 어디에나 자신의 회원들을 보내 거기서 살도록 한다. 그들은 “정신적 현존”이나 “종교적 관심”으로가 아니라 그들의 육체적 현존으로 거기 있는 것이다. 우리의 시위운동이나 방어선을 치는 운동에 대해 생각할 때 이러한 이해는 매우 중요하다. 모든 정신적 우정이나 종교적 동정은 피켓라인에 서 있는 육체적 인간에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이 거기에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본회퍼가 말했고 또 우리가 동참하도록 요청받는 “이 세계에서의 신의 고난”은 그와 똑같이 물질적이다.
(하아비 콕스, 마경일 역, 『신의 혁명과 인간의 책임』, 135-139쪽.)


10. 신앙고백의 교회에서 신앙실천의 교회로

1) 기독교의 진정한 정체성은 교리의 암송과 강조가 아니라 정의, 평등, 평화, 생명 등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예수의 삶을 실천하는 데 있다. (최만자)

2) 신앙의 참된 근거는 나사렛의 가난한 청년이 배고픈 자들에게 떡을 나누어 주고 눈먼 자들을 보게 하고 정의를 위하여 살다가 죽었다는 데 있다. (도로테 죌레)

3) 우리는 (예수의 피가 사람의 죄를 용서한다는) ‘피에 의한 속죄론’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신화다. (로버트 펑크)

4) 나는 값싼 은총이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병폐라고 생각한다. 예수가 우리를 대속해서 우리 죄를 다 용서하고 죽었는데 그것에 '아멘' 하고 고마워하면 되지 다른 것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미 구원은 다 이루어졌으니 애쓸 필요도 없고 그저 찬송만 부르면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예수가 보여 주신 모습과 그것에 따라 살려는 긴장은 하나도 없다.
어떤 신학자의 말대로 예수를 따를 필요도 없고, 따를 수도 없고, 따라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따르지 않아도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이고, 따르려는 것은 교만이고, 죄인이니까 따를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주종을 이루기 때문에 신앙생활과 사회생활이 별개의 것이 되고 말았다. (길희성 교수)

5) 기독교는 인간적인 종교입니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에게 해탈(解脫)이나 도통(道通)을 요구하지 않았어요. 그냥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뿐이지요.... 저는 지각이 생긴 후, 즉 크리스마스 밤에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머리맡에 선물을 놓고 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게 된 때부터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신자이기 때문에 평안을 누렸다기보다는 오히려 고민 속에 살았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가톨릭 신자 具常 시인, 동아일보 2001.3.23).

6) 참된 그리스도인은 신앙을 고백하는 어느 한 교파의 구성원이 아니라 그리스도적인 삶으로써 참으로 인간적인 존재가 된 사람이다. 노예적인 규범과 법 체계를 준수하는 자가 아니라 단순한 인간적 선을 위해 자유로울 수 있게 된 사람이다”(라찡거).

7) 예수님의 길을 직접 가는 대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안일하고 이기적인 신앙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끌고 간다. 신앙이 자라서 결국 예수님처럼 되는 것, 예수님을 닮는 것(imitatio Christi)이 기독교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다. 예수님의 메타노이아 체험을 우리도 체험해서 예수님이 이웃과 인류를 위해 자기를 바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 이를 수 있는 극점이다. (오강남 교수)

8) 구원한다는 것은 해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 안에서 교회는 보다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을 창조할 목적으로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교회는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 일을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십자가와 박해와 모함은 신자들의 몫이다. 교회는 극소수 사람들이 자기네 부(富)를 축적할 수 있도록 절대 다수의 사람들의 가난을 그대로 방치하거나 더욱 더 악화시키려 드는 자들의 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정의구현전국사제단 엮음, 『하느님 나라의 일꾼』, 일과놀이, 66-68쪽.)

KSCF

2008.01.14 13:56:36
*.5.53.44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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