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중항쟁 37주기 시 모음> 황지우의 묵념 527

 

+ 묵념 527

 

(황지우·시인, 1952-)

*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는 시. 그러면서도 많은 얘기를 한다. 여기서 '527'는 광주항쟁에서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유혈 진압된 527일을 의미한다.

 

 

+ 오독

 

어느 시에서 나는

'화염 속의 내 고향 광주'

'화엄 속의 내 고향 광주'

잘못 읽었는데

 

그렇게 읽길 잘했어

 

화엄이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옆에서 죽는 놈 짠하고 불쌍해서

내 목숨 들이붓고 피 뿜는 짓이 있다면

그것이 화엄 아니겄냐?

그것이 불타는 엄숙함 아니것냐?

(홍헌호·시민경제사회연구소 연구위원)

 

 

+ 목련이 진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설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닢 한닢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 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예 그리 슬프랴

(박용주·시인, 1973년 광주 출생)

* 박용주는 19884월에 쓴 이 시로 전남대가 주최한 1988'5월 문학상'을 수상한다. 놀랍게도 그때 그의 나이 15살이었고 전남 고흥 풍양중학교 2학년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더 진한 감동을 주었던 작품이다.

 

 

+ 광주에 바치는 노래

 

1.

그해 5

광주는 달도 밝았다

호남선 특별열차로

헬리콥터로 떼몰려온 흡혈귀들이

온 시가지를 쑥밭으로 만들 때

 

2.

광주는 그러나

달도 둥그러이 밝았다

집집마다 거리마다

침략자와 같은 몽유병자들이

피에 굶주려 날뛸 때

 

3.

그해 5

광주는 끝없는 바다였다

갈매기가 날으고

돛이 오르고

파도가 나는 바다였다

, 섬들도 사람들로 울부짖는

 

4.

그해 5

광주는 고독한 십자가였다

학살자들이 황구(黃狗)를 그슬리며

시뻘겋게 웃을 때

신부와 스님들도 잡아가서

불알이 깨져라고 두들겼을 때

 

5.

그해 5

광주는 부러진 십자가였다

발가벗겨 내팽개쳐진 부처의 알몸이었다

그러나 그해 5

광주는 또 다시 볓 번이고

치솟아오르는 불사조!

 

6.

아아, 그해 5

광주는 달도 밝았다

사람들의 마음이 강물처럼 흐르고

길가의 가로수도 어깨동무 해주고

사람 세상 통일 세상 강강술래였다

 

7.

총칼뿐인 악마들이

사방팔방 미친 듯이 들쑤셔도

온 시가지가 보리밭으로 출렁이고

사람들은 서로를 아껴주고

이 땅의 갈 길을 향하여

살과 뼈의 깃발을 흔들었다

 

8.

아아, 그해 5월 광주는

함께 사는 즐거움이 있었다

함께 쓰러져 죽으면서도

함께 일어나 살고야 마는

하늘 같은 하늘 같은 펄럭임이 있었다

(김준태·시인, 1948-)

 

 

+ 오월꽃 그대

 

그대가 돌아오지 않던 그 봄날

우리 마을엔 아무도 없었네

모두들 그대와 한 몸이었으므로

 

그대 금남로에 피투성이로

사람의 길을 열고 있을 때

우리 마을엔 들불의 기운이 감돌았네

 

그대 이웃들과 함께 처절한 봄이 되어 떠나간 뒤

우리 마을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네

보기만 해도 온몸이 용광로처럼 달아오르는

 

그대 비록 뱀같이 싸늘한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갔지만

갈라진 이 땅 숨소리 들리는 곳마다

온몸 들썩이는 오월꽃으로 피어나고 있는 것을.

(홍관희·시인, 1959-)

 

 

+ 금남로

 

사랑이 넘쳐흐르는 거리였었다

희망이 잠들지 않는 거리였었다

억눌린 사람들의 정직한 목숨이

공기로 햇살로 빗물로 쏟아지던

오오 하느님 같은 사람으로 넘실대던

낭만이 넘치는 사람의 거리였었다

 

밝은 그 거리에

사람과 하느님과 모든 생명들이 하나가 된 그 거리에

도깨비 같은 총탄이 쏟아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들의 음모와 욕망이 쏟아져

삶과 죽음이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이야

하느님과 사탄이 그토록 가까이 있을 줄이야

 

분수대조차 말라버린 그 거리에는

슬픈 꽃 한 송이도 피지 못하였지만

 

한 많은 그 오월의 십자로에

스러져간 벗들에 대한

어둡고 긴 기억의 터널을 지나

우리들의 사랑은 또다시 타오르고

무등산 바람은 시퍼런 눈빛으로 다가와

하느님 닮은 사람들 가슴에 청솔을 심어놓는다.

(홍관희·시인, 1959-)

 

 

+ 무덤 앞에서

 

상원아 내가 왔다 남주가 왔다

상윤이도 같이 왔다 나와 나란히 두 손 모으고

네 앞에 내 무덤 앞에 서 있다

 

왜 이제 왔느냐고? 그래 그렇게 됐다

한 십 년 나도 너처럼 무덤처럼 캄캄한 곳에 있다 왔다

왜 맨주먹에 빈손으로 왔느냐고?

그래 그래 내 손에는 꽃다발도 없고

네가 좋아하던 오징어발에 소주병도 없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직

 

나는 오지 않았다 상원아

쓰러져 누운 오월 곁으로 네 곁으로

나는 그렇게는 올 수 없었다

승리와 패배의 절정에서 웃을 수 있었던

오 나의 자랑 상원아

나는 오지 않았다 그런 내 앞에 오월의 영웅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에 십자가를 긋기 위하여

허리 굽혀 꽃다발이나 바치기 위하여

나는 네 주검 앞에 올 수가 없었다

그따위 짓은 네가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왔다 상원아 맨주먹 빈손으로

네가 쓰러진 곳 자유의 최전선에서 바로 그곳에서

네가 두고 간 무기 바로 그 무기를 들고

네가 걸었던 길 바로 그 길을 나도 걷기 위해서 나는 왔다

 

그러니 다오 나에게 너의 희생 너의 용기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들불을 밝힐 밤의 노동자를

그러니 다오 나에게 민중에 대한 너의 한없는 애정을

압제에 대한 투쟁의 무기 그것을 나에게 다오

(김남주·시인, 1946-1994)

 

 

+ 광주민중항쟁에게

 

부끄럽게도

참으로 부끄럽게도

 

이 땅의 역사에

까막눈이었던 내게

 

소스라치게 역사의식의

불세례를 주었던 너.

 

너를 처음 만나

나의 작은 가슴은 뛰었고

 

너의 진실 알아가면서

네가 점점 더 좋아졌고

 

어느새 너는

나의 정신적 애인 되었는데.

 

먹고사는 일에 바쁘다는

핑계도 못 되는 핑계를 대며

 

너를 등지고 살아온 날이

너무도 길었구나.

 

철모르던 나를

참된 인간의 길로 이끌어준

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삶으로 갚아내지 못하였구나.

 

하지만 네가 태어난 날이

시작되는 이 밤

 

찬물에 깨어난 맑은 정신으로

다시 한번 맹세하나니

 

나의 삶 나의 가슴에

문신처럼 깊이 새겨진 너

 

거짓은 눈곱만큼도 없이

오직 순결한 영혼뿐인 너를

 

내가 이 땅에서 사는 날까지

영영 잊지 않으리.

(정연복·시인, 1957-)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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